Melancholia ; 앎의 질병 ; 마리 클로드 랑보트 Marie-Claud Lambotte - ⓐ

앎의 질병

마리 클로드 랑보트 Marie-Claud Lambotte[각주:1] 

우울증은 역설적인 질명이다. 정확하지 않은 원인으로 고통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이 라스 폰 트리에를 완벽히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우울한 신부 저스틴은 부질없는 준비를 한 결혼식에서, 이미 대재앙을 예감한다 : 붉은 별이 하늘에 떠오른 걸 본다. 안타레스이었다. 그녀가 멜랑콜리아 행성을 계속 숨겨왔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관객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새들이 화면을 덮으며 마치 죽은 생물처럼 추락한다. 마치 모든 것을 미리 들은 것처럼  관객은 그 첫 장면에서 영화의 결말을 감지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에서 자주 나오기도 하는, 전형적인 우울증세를 보이는 말을 내뱉는다 :  《너무 늦었어, 모든게 이미 벌어졌어》. 영화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전개되면서 저스틴과 클래어, 이 두 자매의 태도를 담고 있다. 저스틴과 클레어는 대지에 가까워지는 멜랑콜리아 행성과 그로 인한 재앙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물론 대조적인 둘의 태도-저스틴이 차분히 받아들이는 반면, 클레어는 저항한다-에 따라, 첫 부분은 죽음을 바라는 경향을, 그리고 두번째 부분은 삶을 바라는 방향을 가리킨다. 《조화롭지 않을》가능성에도, 삶과 죽음의 격돌이 강하게 드러나며, 자기파괴의 희열, 그리고 에로티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방법론을 제쳐두고서라도, 환영적 현실을 알리는 사건과, 한편의 아주 영리하게 우울증이란 주제를 다루는 노하우도 주목할 부분이다.《 어쨌든, 최후의 진실이나 의미같은 것은 없다. 그런데 왜 그것을 그렇게 하는가? 그다지 볼만하지 않은데. 》 《모든 혹은 무無》의 행동은 일반적으로 억압적이며 부정적 사고에서 필연적이며 절대적으로 나타난다. 영화의 두번째 부분에서, 클레어의 행동 역시 저스틴과는 완전히 반대로 나타난다. 반면, 저스틴은 홀로 설 수 없으며 자신을 옭아매는 도움을 거부한다. 저스틴을 매혹시킨 그 형편없는 맛의 과자는 클레어가 그녀를 위해 만든 것이다. 저스틴이 주변을 무력함으로 빠뜨리는 동안, 그리고 클레어는 모호하고 심오한 내면의 감정때문에 저스틴을 혐오하는 듯 행동한다. 그러면, 우울증이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상대가 무엇을 바라고 하는 행동인지 너무도 잘 간파하는 것때문에 생기는 것일까? 

욕망의 두 가지 범위
 라스 폰 트리에와 닐스 토슨 Nils Thorsen 의 담화에서, 그는 상실감이나 경험면에서 이 두 자매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 《[클레어]는 무언가 잃을 것이 있다. 아는 지인들, 아이들 말이다. 그녀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며 그녀의 삶에 감사한다. 반면에 저스틴은 잃어버릴 것이 없다. 그것이 우울증이다. 우울증이란, 끊임없이 뭔가를 마라는 것, 그리고 당신이 뭔가 바랄 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에 잃어버릴 것이 없는 것이다.》 욕망의 문제는 이 영화의 중요한 근본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우울증의 문제를 잘 요약하고 있다. 여기에 나는 한가지 더, 우울증이란 이미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더 할 것이 없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그리고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아무 것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이른 시기에 잃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너무 늦었어, 모든 게 끝났어.》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것은, 원인도 끝도 알 수 없는 병을 가진 그녀의 이야기이다. 《 난 항상 그랬어. 나쁜 천운을 타고 태어난거야, 그게 다야, 그게 운명이지.》
  우울증은 그 병의 원인을 알 수 없을 뿐더러, 특별한 상황이 닥치지 않는 이상 상황을 잘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단순한 우울한 감정과는 다르다. 그리고 어느 이유모를 상실로 인한 상처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다르다. (S'il y a déception, c'est bien qu'il y an eu in appel négligé, une demande justifiée qui n'a pas reçu de réponse, et ceci en un temps orginaire tel que le développement ultérieur du sujet en fut structurellement marqué )
 우리는 두 자매의 어머니가 보이는 냉담함을 생각한다. 특히, 저스틴의 모습같이 인간관계에서 보이는 인위적인 모습들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또, 저스틴이 애정의 눈길로 바라보는 아버지의 저속한 행동들, 그래서 그녀가 진지하게 말하고 싶을 때는 소용이 없는 그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이런 예들은 이전의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어머니의 시선을 끌려는 욕망이 없는 것이거나 상징적 부성이 결여된 것이다. 그래서 두 자매들의 판이한 성격만큼이나, 각각의 요소들로 정신분석이 가능하며 다시 구성해볼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욕망에 따라 현실 속에서 부분적으로 환영을 받아들이기로 한다고(클레어) . 아니면 일상 속에서  부자연스럽지 않게 행동하기 위해 절대적 순수를 버리지 않는다고(저스틴). 한편,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부르주아의 의식이기도 한 결혼식 장면에서 가학적인 측면(하인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한 포크 게임, 또는 신부에게 광고문구를 집요하게 강요하는 편집장, 그리고 새로운 고용조건으로 그것을 내세우다가, 결국 그 역시 창피를 당하는 )으로까지 밀어붙인다. 이런 측면은 욕망의 이중성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두 자매 모두, 부분적으로나 전적으로나, 자아분열이 일어는게 불가피해 보인다.

《그 뒤에서, 빛을 발하다》
 저스틴의 시선 너머로 결혼식 동안, 또 다른 시선- 부적합하지만, 절대적 시선이라고 하자-  이 있다. 이 시선을 통해 우리는 저스틴이 나타내지 않은 부분을 느끼거나, 저속한 결혼식으로 묘사된 현실 속 겉치레를 벗어나려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복권 추첨을 위해 항아리 속 공들을 찾는 것이 흥미를 유발하지는 않는다.
점점 다가오는 멜랑콜리아 행성에 집중하는 두번째 부분에서 저스틴은 땅 위의 어떤 존재도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듯, 수많은 경우의 수를 안다고 확신에 차서 말한다. 《난 저 강낭콩 갯수를 알아 : 678개, 그리고 다른 인생이란 없을 것도 알아》그녀는 언니에게, 멜랑콜리아 행성과 땅이 충돌할 것에 초조함에 아이들을 찾는 언니에게 말한다. 저스틴은 우울증의 논리대로, 그리고 합리적인 인과관계와 거리가 먼 논리대로재앙이 닥칠 거라 말한다. 우울증의 범위 내에서,《게임은 이미 끝났다》, 그리고 이러한 극단적인 양상때문에 대조적 요소들 간 타협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어보인다. 그래서 타고난 지성은 논지들의 이질성을 초월하며 (강낭콩 갯수를 아는 것은 우주의 이치를 아는 것과 상통한다) , 세계의 모든 요소들을 어느 하나 우위에 놓지 않고 같은 선상에 놓고 본다. 그러므로 지식은 현실을 무한정으로 대체할 수 없다. 대신 그 이상으로 초월한다. 그 진실은 의미, 진실 같은 개념처럼 절대적이며, 우울증을 위해 계속적으로 욕망을 유지하는 보증이기도 하다.《 그것들 이면에, 빛을 말한다》우울하게 감내하며 말한다 ; 혹은 여전히 : 《그것들 뒤로, 진정한 진실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울증은 현실의 이면에서 빛을 발할 수도 없는, 그리고 삶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없는 사건들에 매달린다 : 그것은 또한 스크린을 가득 채우며, 어떤 면이 우울증을 지속시키는 가를 숨기고 있다.
 이 《이면》의 것들이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구성하는 것은 당연해보인다 ; 그래서 저스틴의 욕망, 우울증, 이면의 요소들, 그리고 미학적 구성들이 사건이나 우주의 섭리에 작용한다. 일상의 범속한 구성 뒤에서, 우울증은 환영이 없는《진정한 진실》을 드러낸다. 영화 초반부 멜랑콜리아 행성의 붉은 빛을 본 저스틴은 클레어에게 충돌사실을 말한다. 필자는 몇년 전 프랑스에서 일식이 나타날 때, 이 일을 가리킨 두명의 우울증 환자를 잊을 수 없다 ; 그녀는 그 장면을 보고 내부가 둘로 찢기는 듯한 고통을 호소했다 :《일식같다 ; 그것이 자리를 잡았을 때, 환고리나 달무리를 볼 수 있었다. 해는 달에 의해 가려졌다. 그리고 달의 뒤편에서 빛나고 있었다. 》달의 뒤편, 태양의 화염이 있었다. 마치 현실의 이면에, 우리가 《진정한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 것처럼. 그러므로 태양은 마주보고 있을 수 없기에, 시력을 잃지 않기 위해 선글라스를 써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멜랑콜리아가 우주의 순환 주기에 따라 나타나면, 영화에서 그 여정을 좇았던 것처럼, 일상은 바뀌게 마련이며 근심에 빠지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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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MELANCHOLIA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독일, 2011
연출, 각본 : 라스 폰 트리에 Lars von Trier
촬영 : Manuel Arlberto Claro
Molly M.Stensgaard
Kierten Dunst, Charlotte Gainsbourg, Kiefier Sutherland, John Hurt,
Charlotte Rampling, Alexander Skarsgard, Stellan Skarsgard
Zentropa, Slot Machine
Les Films du Losange
2h12
2011.10.10



출처  :  CAHIERS DU CINéMA
기사  :  Stéphane delorme
번역  :PLONGEUSE ( 잠수부 )
  1. 파리 13대학에서 교수이자 심리학자. 저서로는 우울증의 미학 Esthétique de la mélancolie (Aubier-Flammarion, 1999), 형이상학적 우울증 Le discours mélancolie a la métaphychologie(Anthropos, 2003), 우울증, 치료법 La mélancolie, études clinique(Anthropos, 2007)출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