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공을 따라 ; 멜랑콜리아 Melancholia , Lars von Trier
우선 특별한 프롤로그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프롤로그는 오페라의 개막하는 것처럼 큰 주제들을 섞는다. 그리고 바그너Wagner 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and Isode 의 음악을 배경으로, 아주 느린 속도의 영상들이 이어진다.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판화처럼 : 저스틴(커스틴 던스트 Kirsten Dunst ) (여주인공, 저스틴 은 출판업에 있다)은 양털같은 실에 묶인 채 걷고 있으며, 오펠리아가 한 손에 은방울꽃을 쥔 것처럼 떨고 있다. 저스킨은 죽은 새가 비내리는 주위에 서있다. 이 영상의 가득찬 빛은 네르발 Nerval 1의 시구《멜랑콜리한 검은 해》를 생각나게 한다 : 빛은 역설적으로 초조함을 강조하고 시야를 어지럽히며, 도처에 어둠을 드리운다. 라스 폰 트리에는 종종 포스트프로덕션 과정에서 이미지를 변형시키며 이야기를 마친다(Breaking the Waves 의 키치적 막간, Antichrist 의 장식적 화면 등). 이 영화 전체가 이 검은 구멍의 어둠 속에서 찍은 듯한 인상을 강하게 받으며, 상영이 끝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잔상이 남는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이야기를 둘로 나누어, 각각의 부분에 두 자매의 이름을 따라 제목으로 정하였다 : 저스틴 Justine 과 클레어 Claire 이다. 처음 단락은 저스틴의 결혼식 밤의 정황등을 느리게 분리시키며 묘사한다. 그의 신랑은 그녀를 사랑하며, 상사는 출판사의 예술감독 지위를 제안한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에 없었고 모든 것을 거부한다. 두번째 단락은 이렇다 : 긴장과 무관심에 사로잡힌 저스틴은 그녀의 자매, 이복 형제, 그리고 아이들에게 피난처를 찾는다. 하지만 그들 역시 다른 불안을 가지고 있다. 곧 멜랑콜리아 행성이 지구에 충돌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적인 은유로, 행성은 저스틴의 파괴욕망을 형상화한다. 그녀는 곧 그렇게 할 것이다. 아주 운좋은 캐스팅과 반대로, 커스틴 던스트가 우울증의 저스틴을, 안티크라이스트Antichrist 에서 히스테리에서 벗어난 샤를로트 갱스부르 Charlotte Gainsbourg 가 명령을 지배적인 클레어를 연기했다.
첫 단락은 Festen의 결혼을 연상케한다. 도그마의 신비의 불꽃, 그리고 카메라가 움직이는 탓에 메슥거릴 정도이다. 허튼 짓이 이어지고, 클레어나 위선적인 광대를 조롱한다. 이 축하연을 기획한 클레어는 외모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쓴다. 감독은 환호 속에 저스틴의 비정상을 세세하게 상기시킨다 : 그녀의 어머니와 이복 형제는 가족 사이코 드라마를 연기하는 가운데, 저스틴은 두 눈에는 공허를 담고 뒤로 물러나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거리를 두고 《다시 시작하지》않을 것을 요구한다. 무엇을 다시 시작하지 말라는 것인가? 저스틴이 심한 병을 앓고 있다는 것과 그녀가 결혼과 상관없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된다. 클레어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섬세하게 두 장의 사진- 첫장은 남편이 준 것으로, 상상 속의 낙원처럼 사과나무밭을 찍은 것이다 ; 두번째 장은 저스틴이 뭔가 외치고 있는 게 분명한 어느 펍에서의 자신이다-이 축하연동안 보여지며, 이 심각한 재난에 어울리지 않는 싸구려 행복의 양면을 나타내고 있다. 그녀는 거대한 불행의 이미지에서 행복의 아주 작은 이미지까지 이어지는 것을 좋아한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우울증을 비사교적 인물에 적용하는 듯 하다. 마치 Idios의 시대의 백치처럼. 이러한 백치 또한 집단의 바깥에서 진실을 보는 오만한 방식이다. 하지만 백치는 역시 강력한 혁명분자이며, 그 역할은 매우 정치적이다. 어머니(Charlotte Rampling)로부터 이러한 혁명의 피가 이어진다. 그녀는 결혼식에서 물놀이를 하고(그녀의 딸처럼), 사회의 경계선에 있고자한다. 그녀의 반항 정신은 저스틴이 가진 무신경함과 대조된다. 그리고 아버지는 러시아 문학(체호프Tchekhov , 도스토예프스키Dostoië̈vski)속의 한 인물로, 사회에 불만섞인 농담을 하곤 하지만 진실을 아는 자이다 : 그녀의 딸이 아버지를 원하지만, 그는 가방을 싸서 떠난다. 그러므로 각각의 인물들은 사회와 반사회의 경기판 위 하나의 말이며, 이는 라스 폰 트리에의 진정한 주제이다. 저스틴은 이러한 저항과 슬픈 광대로부터 태어난 괴물인 것이다.
이 창조물은 근본적으로 모든 것에 반대한다. 또한, 이 창조물은 문학에서 등장하는 우주의 상징이기도 하다. 저스틴은 멜랑콜리아 행성처럼 현세계를 파괴하고자 할 뿐 아니라 가능한 모든 세계를 파괴하고자 한다. 그녀가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라 인생이다. 저스틴의 인생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소용돌이로 모든 것을 끌어들이려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 그녀는 성으로 돌아와 씻기 위해 겨우 욕조안으로 들어가, 피곤에 지친 두 눈을 감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서 관객은 그녀가 무너지는 상태처럼 묘사된 것을 본다. 부정적인 감정 밖에 남은 것이 없는 것이다.
이 파괴의 연극은 매우 드물게, 그리고 강하게 상기시킨다. 영화는 처음 보기에도 거대해보이는 호화스러운 성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두 번째 보여지는 성은 같은 장소인지를 의심케 할만큼 보다 작아보인다. 성 앞의 만은 황폐하고 희망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평지대이다. 마치 꿈 속의 장면같다 : 거대한 테라스, 옥상정원, 그리고 거기에서 눈을 뜬 채 재앙을 기다리고 있다. 성 앞의 만과 숲은 서로 대조적으로 어우러지며 장식적인 분위기를 낸다. 그리고 단순하면서, 효과적- 정원, 바다, 하늘-으로,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며, 낭만주의(햄릿의 성)적이며, 타르코프스키 Tarkovski 의 희생Sacrifice 에 나오는 스웨덴 세계의 끝을 상기시키며, 상징적 모티브(Bö̈̈cklin 의 죽음의 섬 L'Île des morts)가 된다.
상징주의는 장식적 모티브, 황홀경의 반복(바그너), 그리고 신 상징주의같이 복잡하게 얽힌 인위적 요소들이 만나는 가운데 생겨난다. 그리고 오펠리 Ophélie 서 은방울꽃처럼 저스틴을 묘사하거나, 세기말적 분위기를 암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인용을 제외하고서라도, 저스틴의 질병을 상징한 행성은 보다 반-자연주의 예술에 맞다. 자크 랑시에르는 말라르메 Mallarmé́ (<<신비주의는 분석을 가능케 하는 간단한 연극의 방법이다>>의 신비주의 이론으로 접근한 고다르 Godard의 영화사 Histoire(s) du cinéma 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인간이 타락해가는 시점보다 <<신-상징주의의 어떤 경향>>(Le Destin des images, La Fabrique, 2003)이 나타나는 시점에 아마 더 가까울 것이다.
칸 영화제에서 멜랑콜리아 Melancholia 멜릭Malick감독의 트리 오브 라이프 The Tree of Life 가 동시에 오른 것은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 이 두 편의 영화는 하늘과 땅 사이의 방대한 상징들을 그 원천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그에게 부여되는 심오함을 싫어할 것이다. 그는 클레어가《최후》를《성공적》으로 보내기 위해 준비하는 것, 테라스에 앉아 포도주잔을 들며 건배하는 것 역시 조롱한다 ; 하지만 그 자신은 정작 보다 낭만적으로 찍기 위해 애쓰고있지 않는가?
저스틴과 클레어가 푸른 빛의 연극에 있는 것처럼, 관객은 재앙이 프레임 전체를 장악하며 닥칠 것을 기다린다. 이때, 저스틴의 입에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람들은 왜 화장실에 있지 않으려는거지?》순수한 희생자는 전형적인 아름다운 외모의 몽상가와는 달리, 우울하고 무신경한 어조로 말한다. 여기에서 감독은 이런 진부한 선택을 하지 않았기에, 심오한 단계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대조적 요소를 어떻게 풀어갈것인가?
그 열쇠는 바로 아이다. 이런 선택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다. 초반부터 저스틴은 방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낸다. 멜랑콜리아와의 거리를 재기 위해 철사를 사용하는 것도 아이다. 그리고, 여느 아이처럼, 가장 멋진 광경을 선사할 충돌 사건이 일어난 때에 잠자고 있는 이도 바로 아이다. 그래서 결국 거대한 재앙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이도 아이다. 저스틴은 세 개의 나무로 마술같이 오두막을 지은, 오두막집의 여왕이다. 아이의 오두막을 헐리우드식 세계의 종말 장면을 무위로 돌려놓는다. 현기증의 의식처럼, 폰 트리에는 르네상스의 우울증 을 다룬 소재를 끼워넣고 있다 : 측정기구(아버지의 망원경, 아이의 철사 등), 기하학 형태(행성의 구, 오두막의 삼각형),등. 감독은 이러한 생각을 가속화시키면서 관객을 경이로운 스크린에 빠져들게 하며 끝을 맺는다. 바그너의 음악으로 더욱 심오해진 분위기, 프레임을 가득 채운 행성, 그리고 주위를 뒤흔드는 진동 등이 이어진다 : 하지만 이건은 현실이 아니며, 단지 감각일 뿐이다. 오두막 속 아이는 이러한 상황에 전혀 반대된 모습으로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재앙을 맞닥뜨린 이는 바로 관객이다. ■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독일, 2011
연출, 각본 : 라스 폰 트리에 Lars von Trier
촬영 : Manuel Arlberto Claro
Molly M.Stensgaard
Kierten Dunst, Charlotte Gainsbourg, Kiefier Sutherland, John Hurt,
Charlotte Rampling, Alexander Skarsgard, Stellan Skarsgard
Zentropa, Slot Machine
Les Films du Losange
2h12
2011.10.10
기사 : Stéphane delorme
번역 :PLONGEUSE ( 잠수부 )
- Gérard de Nerval was the nom-de-plume of the French poet, essayist and translator Gérard Labrunie, one of the most essentially Romantic French poets. [본문으로]
'★자료.번역(;Recherche > 매거진①까이에 뒤 시네마②ArtPress③BeauxArtsMagazine'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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