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셀 입자㉠

35mm와 디지털 영상은 무엇이 다른가?
우선, 그 차이를 짚어볼 까?



점점 디지털이 대세가 되어가는 영화의 상영 조건들과 극장의 장비가 그렇다. 하지만 이런 배급 방식과 개발 기술의 변화는 보다 광범위한 변화의 하나의 단계에 다름 아니다. 우선, 디지털 영화는 수년전부터 촬영되어왔고 편집되어 완성되었다. 영화가 HD 텔레비전, 블루 레이 Blu-ray, DVD, 인터넷, 개인적인 경로로 보급이 되면서 규정이 생기기에 이렀다. 이미 언급한 부분이다 : 필름의 소멸은 오랫동안 회자되어 오던 것이지만, 종이가 기록의 도구로 컴퓨터 모니터나 프로그램에 으로 이어졌듯이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에 Cahiers 를 수중에 들고다니지 않는 일반적인 관객은 35mm영사기가 디지털 영사기로 대체되어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할 지도 모른다. 디지털 영화는 공공 상영처럼 보다 뚜렷하게 어느 한 요소를 가두고 있다. 그리고 그 요소는 보다 애매한 것을 상기시킨다.
 더이상 후반 작업에서 색보정이나 합성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디지털에 어떤 차이를 보겠는가? 이번 기사에서 디지털로 제작가능하거나 불가능한 기술자들은 씨네필들은 이 신 기술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영상이 약호화되고 흔적으로만 남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리고 너무 명확하고, 너무 차가운, 너무 고정된 영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반 관객들은, 이러한이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 영상의 픽셀, 색채, 반점 등을 동결시키면서 고압축된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영상에서 그러하듯이 말이다. 몇몇의 영화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신기술의 카메라로 균일한 밝기나 편평도를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급변하는 첨단 기술에 대해 알거나 특별히 민감한 지각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소셜 네트워크 The Social Network 이 필름으로 촬영된 게 아니란 건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 
 디지털 기준치에 관한 책 신 미디어의 언어 Le Langage des nouveaux médias -이미 번역 초반이 10년전에 출간되었고, 지난 해 재판이 발행된- 에서 레브 마노비치 Lev Manovich 는 30년대에 독일 엔지니어인 콘라드 추제 Konrad Zuse 가 어떻게 《디지털로 작용하는 첫 번째 》 컴퓨터를 발명했는지 말하고 있다. 천공 테이프는 가격 절감을 위해 인화하고 남은 35mm필름을 재 사용하였다. 《얇은 막의 파편은 원래 필름에 새겨진 이미지가 나타나곤 하였다.》 마노비치 Lev Manovich  는 이 것을 영화와 프로그램의 기원이라고 설명한다 : 《영화의 도상적 코드는  이중적 코드때문에 버려졌다. 영화는 컴퓨터의 노예가 되었다.》이 기원은 우리가 현재에 다시 부활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 코드의 흔적은 더이상 특징이 없다. 마노비치는 그의 다음 저서에서, 영화의 침해가 시각 매체의 전복과 정보 처리 프로그램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설명하고 있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더라도, 피해자는 있는 법이다 : 아마 그 피해자는 안토니아니가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인용하며 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온화한》.
  이 온화함은 매체가 서로 혼합되는 과도기에 있는 우리가 보기에 아주 열정적이며 역동적인 개념이다. 카롤린 샹프티에 Caroline Champetier가  지난 7월호 카이에 Cahier(Nº 669)  에 인터뷰로 밝힌 것처럼, 《이 두 가지 방법이 공존하는 상황을 이용할 수 없으면서도》우리는 현재 이러한 《혼성》의 순간을 지나고 있다. 극장을 언급하지 않도도, 이 혼성은 임시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디지털 상영은 완전한 기준치나 전용 극장도 부족하다 : 신형 디지털 카메라인 Arri Alexa 로 촬영한  멜랑콜리아 Melancholia Drive 를 디지털 상영관이나 35mm영사기를 통해서 볼 수 있다. 또는 35mm로 촬영된 관용의 집 L'Apollonide 이나 아웃사이드 사탄 Hors Satan 을 35mm영사기로 볼 수도 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입구에 들어가면서 그에 대해 알 권리가 있지만, 영화 관람의 기술적 정보에 대해 많은 논쟁을 하면서도, 디지털에 대해 잘 못 알려진 것도 있다. 기존의 필름 영화의 지위나 계보가 너무 견고하기 때문에, 디지털이 모욕감을 주겠지만, 부분적으로 관객은 이미 이 혼성을 받아들이고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의 탱탱 TinTin 에서 실제 사람과 그림이 섞인 것을 보라 :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영상에서 뭐가 더 나은 지 판단 할 수 없다.
  
 
대조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은 가장 단순한 데에 있다 : 바로 대조이다. 35 영사실에서 영화를 본 다음 같은 영화를 디지털로 상영하는 극장에 가보라. 혹은 그 반대의 순서로. 물론 차이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미 우리가 가지는 기술적 정보는 인지감각에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이다. Super 8 처럼 영화사에서 차용한 제목의 영화( 35mm로 촬영된 )나 Drive  (디지털) 는 매체의 변화에 따라 의미가 달라졌다. 그 자체로 체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변화를 암시하거나 언급하는 것이다 ; 또는 필름 영화라도 합성된 영화를 상영 시 장비나 기술적인 문제도 있다. 서로 다른 기반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대조적인 매체라도 일반 관객의 입장에서 그 차이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아티스트 The Artist 에서, 반대로 무성 영화 형식의 것으로, 매끄러움과 입자가 드러나는 현상이 반복되면서 마치 디지털 영상인 것처럼 보인다 . 파리의 Grand rex 상영관을 제외하고는, 흑백 화면에서 보다 빛나는 부분에는 깨끗하게 녹색과 자색의 윤곽선처리가 되어 보인다. 디지털은 급격한 처리를 하기 때문에, 특히 발긍ㄴ 부분(와이셔츠, 하늘)에서는 1910년대에도 보지 못했던 선명함이 보인다. 그래서 이 영상은 무성 영화의 고요를 더욱 강조하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특히 Bejo 가 집에 불이 났을 때, Dujardin 이 간직했던 필름의 포토그램을 보는 장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입자는 그 떠들썩한 시작이면서 우리는 아주 간단하게 이미지가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된다. 
 대게 이런 차이는 35 영사방식에서는 크지 않다. 카피본을 사용할 수록 손상이 되거나 이미지에 고르게 먼지가 생긴다던가 - 시행 착오 끝에 몇 주가 지난 후에야 겨우 그것을 증명하는 아마추어처럼- 하지 않으면 잘 모른다.
 이러한 대조는 항상 급격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며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디지털 상영(파리의 Max Linder 는 훌륭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이 후 몇 주가 지나 소극장에서 35mm상영된 트리 오브 라이프 The Tree of Life(35로 촬영) 은 아무래도 효과가 감퇴하긴 하겠지만, 그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빛의 어느 요소들은 필름 상영에서도 다르다 :  흑색은 흐릿하고, 전체적 톤은 너무 붉거나 하는 식이다. 비행장을 선회하는 비행기 동체에 광채가 보이는 다양함은 영화 초반부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거대하고 장엄한 우주 시퀀스는 가볍게 보이며, 아이를 상징하는 마이크로 세계는 덜 인상적이다. 트리 오브 라이프 The Tree of Life는 35mm 영화 초판본인 셈이다. 디지털을 사용해 보다 기술적인 향상을 보인 작품이다 : 선명하고 명확한 무한대로 미묘한 차이를 주며 음향적 심오함을 부여한다.

                             픽셀 입자 ㉡에 이어..............



출처  :  CAHIERS DU CINéMA #672. 2011.11
기사  :  CYRIL BéGHIN
번역  :  PLONGEUSE ( 잠수부 ).[작성. 2012.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