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공간
영상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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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영화》,《제 3의 영화》,《유사 영화》에서 보이는 : 표현주의나 신이성주의는 미술관 내 암실에서 이뤄지는 영상의 이탈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런 현상은 최근 10여년 동안 가속화되었고 이미 세르주 다네Serge Daney 가 20여년 전 넌지시 밝힌 바 있다.이른바《방어막으로부터 나와 행진하는》이라는 말은, 영상을 인지하는 조건 뿐만 아니라 이를 제작 방식까지 생각하는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다. 1어떤 면에서 이런 명제 때문에 전문분석가들의 경우를 제외하고, 수많은 오류가 생길 수 있다. 이러한 분석과정이 떄론 불분명한 모호하기 때문이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영상이 움직이는 사이 의미가 전복되는 것에 저항이 생길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네가 영상의 사회학적 기능에 의문을 제기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관객은 영화 속에 늘 존재하는《폐쇄된 영상》으로부터 자유롭다 ; 관객은 움직인다. 단, 그들이 영상을 《파악하려는》태도를 유지한다면 ; 텔레비전이나《비디오 설치물이나 이런 유사 장르의 것》들에서도 이런 신경향이 보인다.
...때로는 의미의 이동
이런 상황은 우리가 영화적 예술을 이해할 때 도움이 되는 원칙과 강하게 대조된다. 즉,《영화관의 관객들이 유동적이라면 그들은 영화 편집도 알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 이런 결론에서 문제는 분명하다 : 유동적인 영상이 보여지는 동시에 관람객도 더 이상 고정되어 있지 않다면 더 이상 편집이 의미가 있을까? 다네가 이 질문에 답한 바가 없는 것은 유감이다 ; 그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진저와 프레드Ginger et Fred에서, 카메라 앞에서 끊임없이 인물 군상을 파헤치며 독보적인 평을 남겼다(그리고 텔레비전에서 자주 방송되는 영화 화면 애 대해서도). 2
이런 논리에는 헛점이 많다 : 여기에 관람객의 태도가 진화함에 따라 변하는 상황을 묘사한다. 관객의 진화를 생각하며 영화가 새로운 대안들을 내놓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여러 시도를 통해 암실 속에 투영되는 영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 영향을 받는다. 달리 말하면, 다네가 영상이 보여지는 새로운 방식에 대해 고려했다면, 그와는 달리 같은 조건의 《공간》에서, 그리고 같은 출발점에서 편집의 미학을 찾도록 하는 것이다.
관객의 영역 확장일까?
다네가 증명한 바에서 드러나는 방향성때문에, 우리는 전시영화에서 몇가지 부족한 결함을 설명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전시를 기획하거나 실현시키는 큐레이터나 영화인, 예술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이 때문에 결함이 생긴다. 그 결함은 바로, 전시되는 영상들이 영화 장르에 대한 고찰없이 영화관에서 곧장 전시장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영화적 개념들이 부적절한 장소에서 보여지는 순간에, 편집은 무엇을 남기겠는가? 또, 오디오 믹싱은, 프레임은 무엇을 남기겠는가? 공간-영상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빼놓고 이러한 논쟁은 하지 않아야 한다 : 영화에 적합한 개념-방처럼 다른 공간-으로 재상연되는 영상은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 그 방에서는 여러 실험들이 충돌해도, 《넓지만 얕은》객설(예를 들어, 건축과 영화가 각자의 원칙대로 다양하게 진행되어 복잡해지기에, 때로는《범주》의 개념에 갇히게 된다. 그로 인해 둘 사이의 충돌이 생긴다)과는 거리가 멀게 꾸준히 성공적일지 모른다.
이런 변화는 적어도 오늘날 이뤄지는 전시 영화애 댜햐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 번째는 《관객》의 범위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 관객은 공간 한 가운데 여러 개의 모니터에 서 있거나,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중심에 있다. 바로 그 관객이 공간-영상에서 나타나는 구성요소들을 섞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것은 관객을 여백으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다 ; 그보다 이런 인지 조건을 강조할 수 있도록 예술가들(혹은 큐레이터)이 선택의 여지를 가진다는 것이다. 질 들뢰즈는 《영상의 기호을 생각하는 관객은 아무것도 머릿 속에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또, 그는 《관객들이 단순한 "평판"에서 느끼는 감각으로 그것이 예술인지 아닌 지 판단하는》것에 매우 한탄스러워했다.
전시 기획자들 중 몇몇은 특히 이런 상호 관계적 예술에 대한 고찰을 하지 않는다 : 관객들은 전시의 절대적인 요소로써 그들의 범위를 확장시키면서, 그에 따라 이미지의 권한의 여부에 대한 고찰이 없다. 분명한 사실을 애써 부정하면서 말이다. 반면,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는 보다 회의적이다. 그는 이런《상호 작용》이 사회계층 간 단절을 회복하기엔 아직 부족하다고 말한다.
영상-공간의 시간
두 번째 결론은 시간과 관련한다. 영화 편집을 사용해서 유사한 시간의 공존을 말하는 현대성을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이런 유사성은 전시 영화의 경우에 도달하기 힘들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 바로 시간이다. 전시는 관람객이 전시장을 배회하며 감상하는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후설Husserl의 의식의 현상학Leçons pour une phénimènologie de la conscience 를 보면 그리 놀랍지 않다. 그는 전시 진행 도중(창조적 예술이라는 전제 하에)에 일시적(일상적 경험이란 전제 하에)으로 소통할 수 있으며, 이를 현상학이란 논리로 풀어냈다. 예상, 기억이나 다른 경험은 사실 아무 효과가 없다 : 바로 현재에 일어나는 변동은 소위《확장된 영화》의 시간에 속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 속에서 편집이 어떻게 이뤄지는 지 알고 싶다면, 들뢰즈에 의해서도 자주 인용된 장 뤽 고다르의 말을 기억할 수 있겠다 : 《나쁜 영화에서는 영화의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영상-공간에 대한 진화를 평가할 기준이다; 영화 유토피아로의 여행의 준비를 마치고, 퐁피두 센터에서 열리는 고다르의 전시 《전시는 진행중인 시간을 보여준다》는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하다. 고다르는 편집의 개념을 바꾸었다. 스크린에 연속적으로 투영되는 영상을 중첩시키거나 이중인화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방식은 그의 영화 여행Voyage(s)에서의 분절된 공간을 복잡하게 하고 앗상블라주 효과를 일으킨다. 영상-공간은 이미 존재하거나 올 예정이다. 3
출처: 49-51page, Artpress #347.2008.6-7
기사: Don Zanbuyan
번역: zamsoo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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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16. 0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