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AA 와 프리츠커 상- 더 부족한 것은 덜한 것인가, 아니면 지나친 것인가?
해마다 수상되는 프리츠커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수상자는 마치 올림픽의 메달리스트에 버금가는 권위를 갖는다. 비평을 반영하며 판정단은 가끔 바뀌기도 하지만 수상자를 선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강렬하거나 그보다 덜하거나 한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그 상이 국제무대에 얼굴을 비추고 일생 일대의 작품에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걸작에 사례를 하기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것도 사람의 일인지라 보다 성공적인 사례에 곧이어 보잘것 없는 결과물을 내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 해의 프리츠커상은 SANAA에게 돌아갔다. 세계화된 건축계에서 끊임없이 담론을 이끌어내는 그들을 알고 있다면 이의가 없을 것이다. 여러 대륙에 걸쳐 명성있는 프로젝트-미술관, 대학건물, 브랜드 부티끄, 전시관, 등등-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있다. 그들의 하부구조에서 오는 특징은 그것을 보는 순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미니멀적 공간, 유기체의 지형, 얇은 골조, 유리로 된 외관의 섬세함, 가벼움, 환함과 자연에의 집중하는 점들이 그것이다. 세계 시장에서 이런 특징이 고유 상표가 되면서 ,프랭크 게리나 자하 하디드처럼 개성이 지나치게 드러나는 것을 피하면서 스타만들기에 동참하고 싶은 고객들에게 이상적인 대안일 것이다.
게다가 SANAA가 체계화시켜가고 있는 건축언어는 보다 간결하다(가끔은 너무 간결하지만). 그렇게 빠르게 결과물을 내놓고 국제 무대에 프로젝트를 실현시키며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이러한 접근은 특히 효과적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나가노 미술관(1999)같이 소규모나 중간급의 프로젝트에서 지면을 가로지르며 주변 자연 경관과 어우러지는 섬세함을 보면 그렇다. SANAA의 작업은 물질성, 투명성, 그리고 피부와 골조를 실험한다. 그들의 세밀한 골조는 현대 일본 건축의 핵심이다. 시대를 거슬러 1930년대를 보면 들보, 기둥, 판재나 목재 지붕으로 이뤄지는 전통 일본 건축에 현대 건축 방식인 강철이나 콘크리트 골조를 도입한 것을 알 수 있다.
코르뷔지에의 영향일까?
SANAA의 작업은 건축계에 축약이라는 문제를 불가피하게 드러낸다. 이상적으로, 추상화를 통해 그 속의 의미를 이면으로 감출 수 있다. 하지만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도안의 우아함마저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 SANAA의 옹호자는 그들에게 젠이 주는 절제미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체 누가, 활력이 없는 피상적인 작업이며 심오함을 주지 못한다고 말하겠나. SANAA의 거대 프로젝트 중 일부는 마치 그 것의 모형물처럼 단조로운 합판 물질로 재현된 듯 하다. 이런 공허함은 종종 공간의 풍부함과 멀어진다; 극도의 단순해지다보면 어떤 경우에 존재 자체를 잃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건물의 환기와 통행 면에서 계획의 부재로 이어진다.
르 코르뷔지에의 스펙트럼은 현대 일본에서 펼쳐지고 있다. 각각의 세대들은 그만의 방법으로 코르뷔지에를 재해석하며, 도미노 형식은 어디라도 동력원이 되고 있다.(예를 들면 1997년 도요 이토가 실현한, 센다이 미디어테크가 있다) SANAA도 그의 방식대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간과하기 힘든 점은 그들이 판재를 기울이며 구간을 주름지게 하는 방식이다. 미국 오하이오의 톨레도 미술관의 유리의 집(2003)은 여타의 작업 중에서도 코르뷔지에식의《자유 구상 도면》인 셈이다. 더 심오하게 재해석된 것이다. 비록 원형 주변에 장방형의 형태를 삽입한 것 (2004년 카나자와의 현대미술관)은 코르뷔지에가 1964년 브라질 대사관에서 미처 실현시키지 못한 것이지만. SANAA가 현대화의 공식을 《수정하는》것은 거의 명백하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1929년 바르셀로나 관처럼 골조의 재사용한다는 점, 투명성을 반영한다는 점은 그런 의지를 잘 보여준다. 혹은 니메이어의 1953년 카사 다 카노아의 유기적 형태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SANAA만이 유일하게 이전의 위대한 걸작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프리츠커는 그 누구라도 전 세계적으로 진보적인 단계를 보여주는 작품에, 그리고 그 것을 실현한 자에게 수여된다. SANAA의 작업은 첫 눈에 호감이 간다. 하지만 절대로 현상을 해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반대로, 줌터Peter Zumthor는 깊이감을 극대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어떤 경우엔, 이런 《단순함》이 건축적 과업이 가지는 복잡함을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로산느의 공학 학교에서 출범한 롤렉스 연수 센터는 이런 여정 속에서 어떤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 굴곡진 주위로 둘러싸인 정원과 구불거리는 지붕과 판재로 인해 주위의 열린 경관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주름》이 현재 트렌드인 것, 특히 일본에서 그런 것(토요 이토의 몇몇 건축물을 보면 그렇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언젠가 그런 움직임이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이 한번은 올 것이다. 연수 센터도 공항처럼 단조로운 톤으로 변할 수 있었다.
고객은 요청하는 것마다 《랜드 마크》가 되기를, 그의 국제적 명성을 드놓여 줄 스타시스템에 기대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런 마케팅 전략에는 단일건물이나 복합건물에서 이뤄지는 잠재적이며 상반되는 기능을 무시하는 의도가 있다. 그리고 그 의도를 감추며,《종합적인 것》를 겨냥한다 :서관, 복잡한 구내 식장, 통로와 상업구역, 은행이나 서점 등등의 기능 말이다. 학습 공간은 보다 사색적이며 내밀한 성격이 필요하다. 그리고 도서관은 정신을 맑게 할 정숙함이 필요하다. 하지만 연수 센터의 지나치게 밝은광과 요동치는 판재는 적절치 않다. 특히 독서공간과 도서진열공간은 그렇다. 집중하기 위해 밤을 기다리기를, 해방자들이 점령자들로 돌아오기를 고집하고 있다.
굴곡진 구조가 연수 센터의 내부에 흥미를 유발했다면, 자유 구상 도면에 드러나는 칸막이의 부재로 인해 건물 안전 체계에 소홀히 할 수 없으므로 바리케이드를 치거나 하는 다른 방안을 고안해야 한다. 산과 들로 이루어진 스위스의 경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건물은 더욱 암시처럼 보인다. SANAA는 클레 데 베른느Klee de Berne에서의 피아노처럼 같은 실수를 한 것이 아닐까? 지형을 따라 즉흥적 효과를 강조하면서 절충적인 태도가 어떤 면에서는 도시 외곽의 우아한 쇼윈도나 무역 기업의 본사같아 보이지 않는가? 다행히 스위스의 고객들은 학구적 분위기에 만족하고 있다.
카즈요 세지마는 다음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의 총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가 어떤 관점을 취할지 흥미롭다. 최근에 그의 전형이 되버린《진부함을 깨뜨리다》의 개념과, 예술적 거드름과 진부함의 타파 이후에 무엇이 올지가 관건이다. 그가 어떤 건축 분야를 섭렵하든 아직 완성되기엔 모자라다.
기사: William J.R. Curtis
출처: 38-40page, D'architectures#192. 6-7month. 2010
번역: zamsoo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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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14. 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