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Michelangelo Pistoletto ; 제3의 천국

1956-74 년 Fondazion Cittadellarte 회고전 Da uno a molti 란 제목으로 로마 MAXXI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에서 열렸다. 심판의 거울Mirror of Judgement이란 제목으로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도 전시가 열렸다.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의 행보를 되돌아보며, 작가의 생동하는 지성, 현실에 대한 참여, 그리고 휴머니즘을 짚어보고 있다. 그는 또한 Evento 의 두번째 예술감독을 맡아, 2011년 10월 6일부터 16일까지 보르도에서 도시와 예술의 만남을 기획하고 있다.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는 78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다. 1950년대 말 부터 그는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지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서로 다른 요소들을 받아들이면서 창조적 협력을 위해 지적인 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아르트 포베라 arte povera[footnote][/footnote] 의 주요인물이자, 시타델라트 재단 Cittadellarte Fondation 의 창립자- 그야말로 진정한《사회적 생산》의 범위에서 예술을 실험하는 곳-이며, 참여적 예술실험을 예견하였다-. 그는 전인적 인간이 되기 위해 변화무쌍하게, 가장 다양하게(회화, 조각, 사진, 건축, 공연, 글, 연극, 철학, 정치, 경제, 과학과 종교) 경험치를 뒤섞으며 틀에 매이기를 거부한다. 외부세계와 타인이 분리될 수 없는 가까운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사고를 예리하게, 그리고 자유를 향해 늘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다. 연대와 공동체의 개념에 대해. 1960년대 회화-거울 Tableau-miroir 에서, 그는 보다 유기체에 가깝도록 다양한 전개를 보인다. 그리고 1990년대, 신호- 예술 Signe-Art에서는 신체와 분리된 다리와 팔들로 이뤄진 삼각형 두개가 교차되고 있다. 그리고 문, 창문, 가구들같은 다양한 재질로 되어있다.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는 접착과 결합의 방법으로 예술과 삶의 소통을 강조한다. 그리고, 사회적 텍스트와 그 모든 분기점에 직접적으로 다가간다. 여러해에 걸쳐, 그는 삶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충돌을 일으키는 요소를 제거하고 개인과 집단간의 정체성을 화해시킨다. 또, Lieu pluriconfessionnel de recueillement et de prière (마르세이유의 Paoli-Calmettes암연구 협회)와 함께 여러 종교와 세속성에 대한 개인적 시각과 전세계적 시각을 짚어본다 ; Love Difference 는 지중해 연못의 형태를 연상케하는 대형테이블 주변으로, 토양, 언어,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시각들을 담고있다 ; 제 3의 천국 Le troisième Paradis 에서는, 기관과 과정, 인공과 자연 사이의 균형있는 사회를 나타내고 있다.
                                                                                                                           DA

빼앗다
작가님이 참여하게 된 시점으로 되돌아가볼까요?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나의 아버지는 예술작품복원 아틀리에의 화가였어요. 아주 어린 나이, 15세부터 뎃셍이나법을르쳐주었고 아버지 곁에서 작업을 하게 되었고, 또 고전 명화를 알게되었습니다. 18세에,머니는 아르만도 테스타 Armando Testa 출판학교에 날 입학시켰어요. 이탈리아에서 가장 활발하면서 잘 알려진 학교였죠. 수많은 출판물을 보면서, 당시 아방가르드에 접하게 되면서, 그의개와절등을 보게 되었고, 자연스레 현대예술로 눈을 돌리게 되었죠. 난 독립적인 무언가를 찾고었고 현대예술은 자유로움, 보다 멀리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주었고, 미지의 영역을 탐험케 했죠. 물론 미래와 과거의 조화를 꾀하면서요. 난 과거에 이어지면서 새로운 뭔가를 하고 싶어요. 그래서 난 내 권한의 범주 안에서, 예술 속에서 나의 영적 정체성을 찾을 수 있도록 하였죠.

■ 그래서 자화상을 그린 건가요?
그건 자화상이 인간의 상황을 보여주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에 대해 보다 힘있게 집중하면서 나의 문화, 수련과정등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고 그러면서 내 존재와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자화상은 이러한 자각을 위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난 거울을 관찰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리고나니 내 얼굴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그 주변도 함께, 반짝이며 사물을 비출 때까지 와니스칠을 한 검은 바탕면으로부터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난 고립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화는 나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내 정체성이 사회적이며 집단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점점 삶과 공간, 그리고 시간에 집접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 움직이는 세계같은 타인의 내부 한가운데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다른 것을 할 수 있었고, 내 작업에서 근본적인 주제로 사회를 삼게 된 겁니다.

■ 어떻게 회화-거울 을 개발하게 된 것인가요?
다양한 시도끝에, 1962년 초에, 유광 철판위에 사진이미지를 접합하는 기술을 이용했어요. 그래서 반사표면 위에 가상 공간을 설정하고 거기에 기억들을 뒤섞은 작품을 만들었죠. 과거는 현재와 공존하고, 미래에 끊임없이 간섭하며 변화를 이루죠. 이런 시간의 역사를 말한 건 나뿐만이 아닙니다. 시간, 그 자체로 말하는 거죠. 회화- 거울은 관객을 그 안으로 흡수하여, 모든 가능한 이미지가 나타나서 표현과 심연이 연결되고, 안정과 유동을 결합시키는 겁니다. 모든 것의 현신이죠. 그건 단순히 동굴 내벽의 흔적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현대의 동굴을 반영하는 세계인 것이죠. 거울이 보이는 이미지는 전체적인 현실에 열려있는 겁니다. 보다 이후에, 그 거울을 더 복잡하게 하기 위해 분할했습니다. 그리고 무한대로 복제하도록 둘로 재단했습니다.

■ 회화-거울 Tableau-Miroir는 오브제 생산방식을 초월하지 않았나요?
1965년 말부터, 새로운 아이디어를 더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무언가 일부만 빼내거나 덧붙여야 하는 강요로부터 스스로 해방시키기로 했어요. 그래서 더이상 오브제를 만드는 것보다 , 안의 오브제 Objets en moins 에서 수공예, 건축, 디자인, 대중 문화, 일상생활에서 겪는 인지적 경험을 담으면서 빈 여백에서 소통을 하도록 오브제를 발표했어요. 반복성과 유사성보다는 차이와 고유성에 가깝도록 했습니다. 그다음에 다른 것으로 옮겨갔어요. 1967년 12월, 아틀리에를 비웠죠. 
 난 모든 예술적 언어에 열려있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 시인, 배우, 음악가, 영화감독 등등 무언가를 만드는 모든 사람에게. Zoo그룹을 만들었죠. 다양한 예술 지침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었는데, 거울의 복합적인 면을 파악하고 우리에서 벗어나 배우가 되는 동시에 관객이 되는 것, 또는 창조자이면서 소비자가는 것이었죠. 그래서 자유의 메커니즘을 창조하고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의식을 깨려했습니다. 아르트 포베라는 소비사회에 반하면서 시작된 면이 있어요. 보다 단순한 것으로 되돌아와서 전단계적으로 재확인시키는 것이며, 사회가 바라는 것에 좌익적으로 간섭하는 거죠.

변환시키기
작가님의 예술적 행보는 변형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변형, 그것은 아무것도 고정되지 않는 거울이며, 모든 게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거울입니다. 그것은 또한 상이한 요소들의 영구적인 결합이죠.  넝마주의 비너스 Vénus aux chiffons , 역시 영구성과 일시성, 미적 가치, 그리고 수명을 다하거나 버려진 재료와 기억들의 결합이다. 비너스는 추앙받는 위치에 놓인 넝마더미 이다 ; 현대성은 고전을 이례적으로 다루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우린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작품은 오브제임을 넘어서 세상의 핵심에서 작용을 해야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변형을 이용하여 정치, 경제, 커뮤니케이션, 교육, 영적 정신성, 그리고 삶에 다가가도록 하는 겁니다. 예술은 삶에 녹아들어야하며, 시각을 두드러지게 하면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답을 하는 동시에, 즉각적 해결책을 요하는 사회와 집단들과 만나기를 시도해야합니다. 사회적이거나 책임감의 변형을 꾀하는 작품으로 이끌지 않는 비평은 소용이 없는 겁니다. 1998년 초에, 시타델라르트는 비엘라 Biella 공장부지에 세워졌습니다 ; 그의 목표는 사고, 경험, 그리고 다양한 창조와 사색의 지침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기구는 각각 맡은 활동분야에 따라《부서》별로 나뉘어졌습니다. 시타델라트는 여러 기구와세계 분포한 행동파들의 협력하에 조직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모두 다른 문화, 정치, 종교,술가,업가, 대학들 그리고 시민사회 단체 등으로 교류하는 것에 고무적이었죠. 일종의 변형의 지형학처럼 회자되었고 사회 포럼으로 요약되곤 했습니다.

■  2011년 제2회 Evento Bordeaux 에서 예술감독을 맡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게 전임권을 제안했을 때, 난 이 것이 Cittadellarte와의 연관이 있으면서도 우리의 연구에 전환을 할 계기가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도시차원의 개발이 가능했구요. 그래서 보르도방을 다양한 원천으로부터 이어지는 실험의 장으로써 도시와 사회를 재해석하고, 유일하면서 세계만국어의 유형을 생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함께 공존하는 사회를 위한 노력과건들을 만들면서요. 그리고 예술적 표현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확신시키며 경제, 정치, 사회와태계를 살리도록 화두를 던지고자 했습니다. 함께이루는 생산이라는 열망은 보르도지방을 대안적인 공동공간으로 바꾸었고, 도시의 재-혁신을 위한 효과적인 불씨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혁명에한 문제라기 보다, 현 상황을 다시 새롭게 하고 다시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시를 다시-발견하는 것이죠.

재발견하기
이벤토 Evento 는 제 3의 천국입니다. 처음은 모든 것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천국이죠. 그리고 두번째는 인위적이며, 인간의 지성에 의해 태동되어, 행성이 급속도로 파괴되어감에 따라 소멸하는 천국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인위와 자연이란 대척점이 결속한 천국이죠. 이 곳에서 이 반대요소는 비극을 피하기 위해 손을 맞잡고 있습니다. 내 작품 중에 troisième Paradis 는 2003 년 만든 무한의 상징이죠. 이 것은 두번에 걸쳐 연결선을 자르고 세개의 원을 그립니다. 그래서 추가적으로 전통적 상징으로써 두개의 원이 결합하도록 하였죠. 변화를 위한 지렛대로써 행동지점, 집합지점이나 갱생지점이죠.

이번 행사에서 3개의 주안점이 보입니다 : 지속성, 다양성, 그리고 인접성입니다. 어떻게 이 세가지를 생각하신건가요?
 연속성은 예술이 다수의 언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도시 생태계에 따라 변하는 고유의 탄성을 가지고 있죠.  이러한 다양성은 예술을 보다 생생하게 하면서 도시 속 타문화, 사회들와 역동적인 관계를 가능케 합니다. 그리고 소외와 연쇄적인 투기현상을 거부하죠. 교차로에서 예술이까이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도덕적이면서 자가 성장이 가능한 새로운 경제를 만들도록 자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관계를 깊이 생각한 후에 행해지는 것들은 역사적, 예술적 울림을 가지며시로 이어졌습니다. 보르도에서 연극, 공연, 컨퍼런스, 그리고 공공예술 등에서 뿐 아니라직이는 공장이나 지식을 공유하는 것으로 이어졌죠. 도시 한가운데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를기해아온 방문객과 주민들 간에 협력이 이뤄졌습니다. 그들은 시민과 예술 간의 절박한 관계를 확신하면서 사회문화적 혼성과 현실을 보도록 하였습니다.  ■


출처  :  ARTPRESS #382. 2011.10
기사  :  Didier Arnaudet
번역  :  PLONGEUSE ( 잠수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