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드 가루스트 Gérard Garouste_

□ 바깥 세상을 걱정하지 않고 세계를 그릴 수 있는가? 제라드 가루스트[파리의 Templon 갤러리에서 10월 29일까지 전시 ]라면 가능하다.  이 우아하고 교양있는 사람은 40여년 동안 그의 개인적 신화를 저버린 적이 없다. 유태인 배척자였던 아버지와 점차 강해지는 광기사이에서 겪은 트라우마이다. 집착처럼 기준들이 가지는 중압감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그는 점차 시간을 잊어간다. 가루스트는 집단의 신화를, 파우스트에서 돈 키호테, 골룸에 이르기까지 상기시킨다. 이는 점차 쇠약해지는 무의식을 더욱 활발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는, 제롬 보쉬 Jérôme Bosch 와 마크 샤갈 Marc Chagall 사이의 교차지점에서 초현실적인 방법을 사용하며, 장식적인 방식으로 그린다. 《그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지만, 아마추어 애호가가 아닙니다. 그의 작품은 기쁨이나 슬픔같은 감정을 위해서 이뤄지는 게 아니죠.》철학자 미쉘 옹프레 Michel Onfray 가 말한다. 
 물론, 가루스트는 전략적으로나 허술한 논리에 몰두하지 않는다. 프랑스 기관과 아방가르드 파에 무시되어왔었다. 혹자는 그의 작품이 낡은 방식으로 태를 부리는 것, 그리고 시대에 뒤처진 것이라 혹평한다. 여기에 미쉘 옹프레는 반문하다.《 무엇에 뒤처진 것인가요? 그 말은 분석이라기 보다 모욕에 가깝습니다. 분명 역사적 범주에 속하지 않는 화가들도 있습니다. 당장 해석할 수 없는 작가도 있는 법이죠. 가루스트에 대한 오해는 이런 미개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이런 야유와 지지 속에서, 가루스트는 노선을 바꾸지 않는다. 《동시대 많은 현대작가들이 잊혀져가지만, 그의 작품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는 그렇게 계속해서 인정받지 못하는 작가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본질적인 모순을 상기시킨다.》Templon 갤러리의 전시 카달로그에 실린 베르나르 빌스텐 Bernard Bilstène 의 말이다.

예술의 구원자
 관객은 그의 기술이나 숙련된 솜씨가 아니라 어둠의 영역과 층에서 보다 매료된다. L'Intraquille 에 대해 쥬디스 페리그농 Judith Perrignon 은 그의 유태인 배척자였던 아버지, 전쟁 통의 모리배들, 그리고 그의 오랜 정신발작을 기술하고 있다. 그녀는,《그의 골자는 카톨릭 교리에 관한 회의이다. 그의 작품 이면에, 프랑스 전사회의 독특한 역사가 담겨있다.》라고 말한다. 그의 성장배경은 속죄의식이 될 수 있는 유대교에 대한 연구가 어떻게 회화로 이어지는 지 상기시킨다.
 1965년 가루스트는 보자르Beaux-arts에 입학하여 지루함을 느꼈다. 특히, 다니엘 뷔렌 Daniel Buren[각주:1], 올리비에 모세 Olivier Mosset[각주:2] ,미쉘 파멍티에 Michel Parmentier 를 발견하게 된 일이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그리고 나서 피에르 카반 Pierre Cabanne 과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담화로 그는 K.O가 되었다. 싫증이 난 그는 붓을 정리했다. 그리고 Le Classique et I'Indien 이란 제목의 회화를 완성한다. 하지만 작품으로 할 말이 남아있었다. 그는 앞치마를 다시 두르고, 안료를 잘개 부수고, 건조제를 섞는다. 《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우린 다시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다. 시간이 중요한가? 동굴 벽의 손자국이 레디 메이드보다 현대적이지 않은 건가? 모든 것을 하나씩 짚어봐야 한다.》제라드 가루스트의 말이다. 그는 깊은 우울증상을 가진,그래서 예술을 구원으로 여긴다. 《그건 생존의 문제이다. ; 당신이 물에 빠진다면 팔을 뻗을 것이다 ; 나의 경우에는 무엇보다 먼저 내 손을 의심해본 다음에 뻗을 것이다. 회화는 내가 나 스스로에게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회화는 《도구》라는 것을 숙지하는 그는 성경을 통해 히브리어를 연구한다. 벌써 13년째이다. 왜 이토록 그는 현재보다 과거에 집착하는가? 이쉘 옹프레는 이렇게 말한다. 《성상의 시대에는 아우라를 포착하는 게 가능했다. 수수께끼같은 회화이면서, 우매하지 않아도 재현을 했다. 현실은 어느 것으로도 대체되지 않는다. 가루스트의 현실은 뒤틀린 나무처럼 휘어져있다.》그의 성장배경에 대해 가루스트는 보다 정확히 말한다 : 《어지러운 광기, 난 그것을 회화로 예기치 않게 표현하고 싶다. 》그래서 그의 회화는 어느 탈출구도 허용하지 않는다.

《사과 안에 애벌레》
 몇년간, 제라드 가루스트는 물감층을 두텁게 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묶음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수수께끼는 점점 알 수 없게 된다. Divine Comédie 을 보면 어떤 단계를 보는 듯하다. 《 이 연작을 보면, 방식적 면에서 고전주의를 밀어붙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고전주의으로 개요를 이해한다면, 거의 추상적인 낯선 회화작품이 될 것이다.》라고 비평가 리차드 레디에 Richard Leydier 는 말한다.
 파리의 호화 나이트 클럽의 건물 장식과 엘리제 궁의 천장화를 맡은 그는 지성으로부터 멀어진다. 《아방 가르드의 부르주아들을 부추기는 요소들을 좋아합니다. 원작에 대한 갈망은 우스운 거죠. 내가 일부분 하고 있지만, 부르주아들을 화나게 하는 것들을 하죠. 게임판에서 나가버리는 게 아니예요. 내가 일번 주자가 될 겁니다. 그래서 나는 사과 안에 애벌레같은 존재이죠.》1982년 가루스트는 뉴욕의 거물인 레오 카스텔리 Leo Castelli 와 손을 잡으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같은 해, 베를린에서 전시 《 시대정신 Zeitegeist 》에서 큐레이터 노만 로젠탈 Norman Rosenthal[각주:3] 에 의해 프랑스인으로는 유일하게 참여작가로 초대된다. 그는 동시대 독일작가나 미국작가들을 견제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나칠 정도로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날 실망시키는 사람은 미술관 관계자들이 아닙니다. 그에 대해선 보다 진지한 주제들이 있죠. 예술은 포커게임같죠. 모두가 각자의 카드를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제일 가는 패를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니엘 뷔렌에 반대하는 담화를 했지만, 누가 그가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항상 나는 운이 좋았죠. 왜냐하면 내 페이스에 맞출 수 있는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요. 지금 내가 하고있는 것 이외에 하고 싶은 건 없습니다. 연구를 계속하면서 진보하고 있어요. 세계적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 좋지만, 그게 목표는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건 사슬의 한 고리, 풀리지 않게 충분히 견고한 사슬의 한 고리이죠. 》

무균열의 관대함 
 그는 고독하고 유일한 여정에 확신하진 않는다. 하지만 회화적 행보에 한계란 없기 때문에, 진정한 사슬 고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라드 가루스트의 특징 중의 하나는 양식으로 굳히면서 스스로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일까? 《 난 문학적인 작가들보다 객관적인 작가들에게 이끌립니다.》아르망 잘루 Armand Jalut는 이야기한다. 그의 동료인 스테판 판크레아 Stéphane Pencréac'h  는 그의 마니에리즘적인 웨이브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과시적인, 부르주아적 취향의 회화작품이죠. 마치 거장의 형식이 그리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식인 거죠. 회화의 이면에 형식적 역량이 없다면 어떠한 도상과 규칙이나 준거들도 그 자체만으로  작품이 되지 않는다. 가루스트는 의미를 만들고, 그것을 이해하도록 지나치게 애쓰는 탓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회화의 혁신은 성경이나 탈무드를 연구하는 데서 이뤄지지 않는다.》라고 일축한다.
  그레고리 포스노 Gregory Forstner 만이 유일하게 그의 세계에 동의한다. 《그는 내 사고 영역 안에서 늘 영원하다. 독보적인 예술과 독립적인 자주성때문이다. 그는 내밀한 감각에서 출발하여 어느 세계를 상기시킨다...그리고 나는 거기에 깊은 유대감을 느낀다.》
 가루스트는 사회에 눈을 돌려 보다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91년, 어려운 상황의 아이들을 돕기 위한 지금을 노르망디에서 창설한 데에 참여한 것이다. 이 기금은 아이들이 추방되는 것을 방지하고, 파브리스 위베 Fabrice Hyber[각주:4] 나 이안 페이-밍 Yan Pei-Ming[각주:5] 같은 작가들과의 만남으로, 잠재적 창의성을 개발시키고자 한다.  릴과 파리의 15구에서 2년간 활동으로 점점 더 알려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더욱더 은둔하려 보이지만. 제라드 가루스트는 이 균열 없는 관대함으로 세상으로 더욱 더 나아가고 있다. 


출처 : 51page, Le Journal des Arts N#354. 2011.10.7-20
기사 : Roxana Azimi
번역 : PLONGEUR ( zamsoobu )
  1. Daniel Buren (born 25 March 1938 in Boulogne-Billancourt, Hauts-de-Seine) is a French conceptual artist.Sometimes classified as an abstract minimalist Buren is known best for using regular, contrasting maxi stripes to integrate the visual surface and architectural space, notably historical, landmark architecture. Among his chief concerns is the ‘scene of production’ as a way of presenting art and highlighting facture (the process of ‘making’ rather than for example, mimesis or representation of anything but the work itself). The work is site specific installation, having a relation to its setting in contrast to prevailing ideas of a work of art standing alone. [본문으로]
  2. Olivier Mosset (born 1944 in Bern, Switzerland) is a Swiss visual artist. He lives and works in Tucson, Arizona. Mosset has spent considerable time in New York and Paris. In Paris in the ’60s he was a member of the BMPT group, along with Daniel Buren, Michel Parmentier, and Niele Toroni.[1] The group brought forth questions about the notions of authorship and originality, implying that they often did each others’ works, and that the art object was more important than its authorship. Later, in New York in the late ’70s, Mosset undertook a long series of monochrome paintings, during the heyday of Neo-expressionism. He became a founding member of the New York Radical Painting group, radical referring both to an implied radical social stance, as well as a returning to the radical “root” of painting. This re-assertion of social relevance for abstraction, and even the monochrome, hadn’t been emphasized to such a degree since Malevich and Rodchenko. 1980s neo-geo artists such as Peter Halley who assert a socially relevant, critical role for geometric abstraction, cite Mosset as an influence. [본문으로]
  3. Sir Norman Rosenthal (born 1944) is a British curator. He was Exhibitions Secretary at the Royal Academy from 1977 until 2008.[1] His encyclopedic programme of exhibitions which stretched from Egyptian antiquities to recent art production, included the exhibition of Charles Saatchi's collection of contemporary art—Sensation (art exhibition) which showcased many of the YBA artists. [본문으로]
  4. (born 1961 in Luçon, Vendée) is a French artist.Hybert has suggested that his work explores ‘the enormous reservoir of the possible’ (Eyestorm 2007) via a deconstruction of language and communication. To this end he deploys a very wide range of media for the purpose of expanding the range of his creative practice, deconstructing language in order to present the viewer with puzzles. He abjures the coherent, instantly understandable, text and the consistent oeuvre in favour of a proliferation that reflects the fundamentally nonlinear character of cognition. This is art in the tradition of the Surrealist object and stream of consciousness. It is more akin to James Joyce's Finnegans Wake than it is to classic narrative, it is Dionysian rather than Apollonian. On the other hand some of his projects look like exercises in visual language, his square football is not especially bewildering. It is quite simply a functional object that is turned into an ideal form (the cube). His idealised, cubed football maps onto the horror of function that characterises post-Duchampian fine art that rose into dominance in the international art world in the 1960s. Fabrice ironically refers to such functionless objects as Prototypes d'objects en fonctionnement (prototypes of working objects), or POF. Another instance of connecting the previously unconnected (cf. Simon Starling) is Hybert’s Swing (POF No 3), 1990. This is a playground swing with the addition of ‘two phallic protuberances on the seat, one hard, one soft’ (Eyestorm 2007). The pedophilic connotations appear to escape the artist or the art world for that matter. Another work Roof-Ceiling (POF No 10), 1995, consists of a mechanical device which vacuums up the rubbish in a room and deposits it in a transparent ceiling overhead; installed in a hairdressing salon, it allows the viewer's newly sheared locks to become part of the architecture. ‘(Eyestorm 2007). This work is not only a demonstration of creative cognition it is also a valuable excursion of fine art outside the museum and into everyday life. Hybert is one of the artists that Nicolas Bourriaud included in his account of so-called relational art which is to say art that engages with people and everyday life (Bourriaud 2002). [본문으로]
  5. Yan Pei-Ming (Simplified Chinese: 严培明; pinyin: yán péimíng) is a Chinese painter born in 1960 in Shanghai. Since 1982 he has lived in Dijon, France. His most famous paintings are "epic-sized" portraits of Mao Zedong worked out in black and white or red and white. He works with big brushes, and his paintings are brought to life by the rapid brush strokes which structure the picture space.[1]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