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메카시 Paul McCarthy_interview

 


앙베르Anvers(파리) 의 미들하임Middelheim미술관에서 폴 메카시는 Air Born이란 표제로 첫 전시(4월

27일부터 10월 28일까지)를 열었다. 그만의 분위기로 장악된 조각공원에는 8점의 작품(이번 전시를 위한 5개의 작품을 포함하여)이 전시되었다. 이 조각공원에는 로뎅, 마욜[각주:1] ,파나마렝코[각주:2], 칼 앙드레[각주:3], 유프 판 리스하우트[각주:4],프란츠 베스트[각주:5]의 작품이 공존한다...두번째로는 오르후스(덴마크)의 ARoS와 스톡홀롬 현대 미술관의 협력으로 S.M.A.K박물관에서 (벨기에 겐트에 위치)이뤄진 회고전(2008년 2월 17일-10월12일까지)인 Head shop/ Shop Head. Works 1966-2006 이 그것이다. 이 전시에서 그는 매우 거대한 설치물을 선보였는데 표현방식이나 창조 과정의 동기, 사용된 매체란 면에서 그의 40년대 작품세계를 되새기게끔 하였다. 아상블라주를 사용하되 반복적으로 역동성을 강조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최근에 그는 이렇게 지적한다 : 맥카시는 프랑스에 충분히 호의적인 데 반해 그의 회고전이 열리지 않는 것인가?

■ 로스엔젤로스와 샌프란시스코에서 받은 수업이 당신에게 미친영향이 있습니까? 작가가 된 이래로 언제 수학하였나요? 당시에 누가 문화적 주류였나요?

전 여러번 유타에 있는 대학과 교류했습니다. 1964년부터 65년까지 친구가 한명 있었는데 그는 자동차를 조각으로 제시하거나 벽에 거는 그림으로 제시했습니다. 난 라우센버그와 정크 조각-비트 아트-에 관심이 생겼어요
1966년 1월, 유타주립대학으로 가서 레보 푸셈raivo puusemp을 만났습니다. 그는 도날드 저드와 이브 클라인(66년이나 67년에 조각가로써 창문으로 뛰어들었습니다)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나로선 그것은 명확한 시詩정과 연관되 보였습니다. 1966년 대학의 예술학부는 실험영화 학과를 개설했습니다. 거기서 브루스 코너, 케네시 앙제, 고다르, 베르그만과 워홀의 영화를 봤습니다. 1966년부터 67년까지 난 기타이, 요코 오노, 오리츠, 구스타브 메체, 알란 캐프로우, 울프 보스텔 등에 관심이 있었고, 이후 67년에 브루스 나우만의 작업을 봤습니다.

이후에 영화를 찍으려는 의도로 샌 프란시스코를 떠났나요?

68년에 샌 프란시스코에 정착한 이래로 뭔가 다른 것을 찾았습니다. 보다 실험적인 장면을 원했지만, 학교에서는 실제로 페인팅만을 다루었습니다. 캘리포니아 표현주의의 계보를 따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난 조각을 하고 영화를 찍기를 바랐습니다. 나우만은 더 이상 교수자리에 있지 않았고, 로스엔젤로스로 떠났습니다. 그래도 샌프란시스코는 여전히 활기에 넘쳤습니다 : 다수의 합작, 다수의 예술가, 예술 공동체 등등이 있었습니다. 예술계, 갤러리, 박물관은 더 이상 내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68년부터 69년까지 내 작업을 계속 진화하고 있었습니다.


페인팅과 액션


이후에 로스엔젤로스에 정착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떠났나요?

아닙니다. 난 1969년 봄에 유타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당시엔 아직 베트남전이 진행되고 있었고 내가 예술협회로부터 학위를 인정받은 이후에야 내가 군사 징집에서 제외된 것을 알았죠. 내가 국가의 부름을 받았던 1969년에 여기에 불응했고, 조정위원회가 법적인 해제를 선고할 때까지 유타주에 있었습니다. 여러번 내 소송이 법정에서 진행되었고, 로스엔젤로스에 머물렀습니다. 난 영화학교로 명망있는 USC(남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제안한 교수직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학교에서 헐리우드 산업이 태동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난 상업영화분야의 한가운데에서 실험영화를 찍으려 했고, 그것을 산업으로 체계화 시키려고 했습니다 :  이상적인 재정비였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나는 그것이 실험영화의 새로운 단계로 자리잡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세대로 말입니다. 바로 유토피아적이며 이상적인 구상이었습니다. 

당시에, 그러니까 1970년대에 당신은 비디오와 행위예술을 시작했는데요...

1970년대 이전에 난 플랙 페인팅, Le Dead H. 을 했었습니다. 가구들을 부수는 장면을 찍었습니다. 1960년대 말에, 비디오 매체를 다루는 것이 어려웠고 불가능했었습니다-당시 고등학교와 대학교에만 있었다-. 나우만은 카스텔리 갤러리에서 그를 위해 장비를 마련해 준 덕에 비디오를 촬영했습니다. 내가 USC에 들어간 이유는 비디오를 찍기 위해서였습니다. 난 그곳에서 영화학부와 예술학부의 과정을 동시에 밟았습니다. 하지만 영화학교에서는 더 이상 내 작업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최근작은 전적으로 얼룩지게 하기, 반복하기, 그리고 신체에 관한 것입니다 : 난 나레이션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비디오 촬영을 하기 이전에, 난 영화를 촬영했습니다. 1959년, 헨리 무어(폴 메카시의 처녀작)의 조각을 이용해 나름으로 번안했습니다. 판재로 된 작은 조각으로, 헨리 무어는 실패할 것이다 란 제목이었습니다. 공기를 주입하여 휘트니 뮤지엄의 꼭대기에 설치한 조각을 연상시켰습니다. 그리고 미들하임 조각공원안에서도 찾을 수 있죠. 난 내가 성인이 되기 시작한 무렵인 1950년대에서 60년대까지의 작품을 현재에 재적응시키고자 합니다. 난 재활용되고 있습니다. 매순간 순간마다 말이죠.

 


쌓기와 연쇄충돌


재활용한다지만, 같아보이진 않습니다...

내가 16세(혹은 15세)에 실현시킨 헨리 무어는 매우 작은 크기였습니다. 지금은 휘트니미술관에서 15미터의 조각품이고,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가 16세에 생각했던 미술관의 거대한 이미지를 변형시킨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주 진지한 농담같은 것이죠.

퍼포먼스와 신체와 연관하여 당신의 첫 영화와 비디오작품을 묘사할 수 있습니까?
1967년에 경주용 자동차에 관해 촬영을 준비했습니다. 결국 미완으로 남았지만요. 경주용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주차를 반복하며 엔진으로 토템을 상징하도록 쌓는 등의 작업과 블랙 페인팅을 했었습니다. 이 페인팅은 2미터를 넘었습니다. 오브제를 쌓는 것은 항상 내 작업의 일부입니다. 난 항상 쌓는 작업을 합니다. 하나에 이어, 그 하나의 밑에 병들을 쌓아둡니다... 블랙 페인팅은 그 경주용 자동차 그림에 이어 한 것입니다. 에드 라인하르트처럼 연이어 쌓고 고정시키는 작업이었습니다. 난 이 페인팅을 한 곳에 같이 걸었습니다. 경주용 자동차 페인팅 과 블랙 페인팅 은 불에 탔습니다. 난 평면에 그렸고, 땅이나 테이블 위에 직접 그렸습니다. 그림은 《경기장》이나 《장면》입니다. 난 도끼나 망치로 내리치곤 합니다. 작업대 위의 그림을 그리는 것도 그렇지만, 붓으로 그리는 것보다 손으로 직접 그리는 것은 보다 훨씬 간단합니다. 그림을 태우는 것으로 금새 거무스름해지죠.
1967년 난 한 커플을 촬영했습니다. 서로 전혀 모르는 여자와 남자는 한 집에 벌거벗고 있도록 했죠. 그 곳엔 카메라맨 1명만 있었고 방의 전경을 촬영했습니다. 커플이 창문을 통해 보이면 바깥에서 보일 수 있을 때까지 거꾸로 카메라를 옮겨 촬영했습니다. 작업은 구조적이면서 미니멀적이었습니다 : 신체, 건축과 카메라 무빙이 다였습니다. 난 정말 이 작업을 좋아하죠.
1970년 디즈니는 칼 아츠를 세우고 교육과 문화적으로 아주 급진적인 인재들을 고용했습니다. 앨런 캐프로우[각주:6]와 폴 브룩은 둘다 뉴욕출신으로 예술학부에 책임자였습니다. 음악학과수업을 위해 그들은 라 몽테 영과 모튼 쉬보드닉을 고용했습니다. 그러면서 학교가 젊은 예술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녀는 소니의 포트백을 대여섯개 샀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남준 박이 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하였었는데 비디오에 관심이 많았죠. 1979년도 난 비디오작업을 내 아틀리에에서 시작했었습니다. 매체를 실험하곤 했었습니다 : 비디오로 신체, 광장, 아틀리에에 집중했습니다. 1971년, 난 나의 종 을 찍었습니다. 코딩작업 중에, 난 디즈니영화 속 마법사처럼 낄낄대곤 했죠. 인물이 등장하는 내 처녀작이었습니다. 나의 종 에서는 엘에이의 전화번호부에 폐오일을 부었습니다. 1972년, 다람쥐의 복통 에서 난 초콜렛과 기름을 주요 소재로 삼았습니다...그것은 내 얼굴과 머리를 뒤덮는 퍼포먼스를 했었습니다. 1976년전에 난 가면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종 에서 내 얼굴은 보여지지 않았죠 : 난 카메라맨에게 항상 그 주변으로만 장면을 배치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인물이 나오는 퍼포먼스에서 내 얼굴은 다시 가려졌습니다. 1960년대에, 난 오일을 퍼포먼스의 소재와 페인팅의 재료로 동시에 사용했습니다. 난 이 오일을 물과 함께 섞었습니다. 물론 섞이진 않았죠. 난 바닥에 놓은 종이위에 부으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학교에 기증한 작품인 나의 종 을 아틀리에에서 그릴때는 내 차에 엔진오일과 전화번호부가 있었습니다. 난 작품이 어떻게 될 지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임기응변의 것이었죠. 다른 것을 동반하는 요소였습니다. 난 같은 방식으로 1970년에 내 친구와 함께 두 유리병에 케찹을 부었습니다. 케찹과 유리병, 바닥은 칼 앙드레의 것과 닮아있습니다...하지만 가죽이나 금속판 대신에 셔츠, 잡지, 유리병, 케첩이 대신하죠. 바닥에서 구조와 오브제는 소비재의 그것으로  잡화상의 진열대처럼 전시되거나 합니다. 당시 내 머릿속에서는 모든 요소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스탕 브랑카에에서 앤디워홀에 이르기까지, 칼 앙드레에서 브루스 나우만 혹은 프란츠 자파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난 연쇄충돌을 생산했습니다. 맥락에서 오는 영향을 뒤섞고 일상적 경험을 뒤섞습니다.

어떤 구조의 공간이 퍼포먼스에 필요합니까?

1970년, 비디오작업을 할 때 기존의 환경을 이용했습니다 : 어떠한 장식도 배제했습니다. 창문이 없는 공간에 매료되었었죠. 내가 공공장소에서 퍼포먼스를 하면, 건축구조에 기반해서 구조를 구축하도록 하였습니다. 시카고에서 죽은 배 라는 퍼포먼스를 위해 배를 연상시키도록 좌석을 배치했습니다. 또한 돛대를 연상시키는 기둥을 한가운데 배치했습니다. 선원의 고기와 목욕통 에서는 호텔의 목욕실과 객실에서 촬영되었습니다. 모니터는 이 두 공간을 분리하는 복도에 위치해두었습니다. 그것은 객실 쪽에서 바라본 시선이 바깥으로 향하는 것을 차단합니다. 카메라맨은 문틀에 자리했습니다 : 대중은 모니터이외에 어떤 행동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욕실에서 목욕통 퍼포먼스가 끝났을 때, 선원의 고기 퍼포먼스를 위해 객실까지 걸었습니다. 대중이 나의 존재를 볼 수 있는 독특한 순간이었습니다. 그곳엔 이미지 간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여러 작품이 있었습니다. 영사막을 통해 공간안의 행위예술가나 객실에 투영된 퍼포먼스를 볼 수 있었고, 모니터는 이미지를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곤 했습니다. 

퍼포먼스의 한계


그럼 최근에 사용하기 시작한 오브제는 무엇인가요...

1970년 난 테이블과 의자, 가구와 장난감을 이용했습니다. 받침대가 된 테이블에 보이곤 했습니다. 나 스스로 받침대 위에 조각이 되었습니다 ; 테이블 위의 조각으로 놓인 것은 바로 나였습니다. 난 퍼포먼스를 하기 보다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은 회화적 전통에 부합하는 것들이었습니다 : 페인팅 속 형상, 구상회화, 그리고 쌓기에 의한 조각을 구축하는 방식등등.
1980년의 초기에 처음으로 장식품을 제작했습니다. 1983년 미스 돼지 의 경우같습니다. 연극에서 여러 공간을 재활용품으로 구축했습니다. 1983년 라이브 퍼포먼스를 그만두기 전에 말입니다.
1987년에 프랑스에서 정부예술보조금을 받았습니다. 내 첫 프로젝트는 알프스산의 하이디 이야기를 리메이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프랑스에 와서 아틀리에를 이용하고 싶은지 문의를 해왔습니다. 그렇지만 프랑스 정부는 리메이크의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난 뽀빠이를 리메이크하고 싶었습니다 : 뽀빠이 인물을 재해석했고, 카랜(폴 메카시의 부인)을 올리브로 분장시키고, 우리 자녀들을 미모사(뽀빠이의 입양된 자녀)로 분장시켰습니다. 혹은 그의 친구인 플루토로 연기했습니다. 난 대본으로 뽀빠이를 사용하기로 고려했습니다. 난 기존의 인물과 시나리오를 다시 사용하였습니다. 1970년대 내 비디오 속 인물은 남자였습니다 ; 이후에, 동물, 혹은 원숭이, 족장, 선장에 이르다가 결국 가상의 인물인 하이디, 피노키오, 알프레드나 크리스마스의 아버지, 카우보이나 해적에 이르렀습니다...

왜 퍼포먼스를 멈추었나요?

난 유럽에서 퍼포먼스를 연속적으로 진행된 후 한숨을 돌렸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에, 여분의 재산이 없었습니다. 조각을 하기 위해서 페인팅을 시작했습니다. 난 퍼포먼스를 대체할 기계적 조각을 원했습니다. 유토피아의 그것만큼이나 디즈니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디즈니에서 완벽한 조각을 이뤄내는 것이나 할리우드에서 완벽한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말이죠. 할리우드와 디즈니와 같은 기술력으로 작업을 하기 원했습니다. 1990년대에,《페티시적인 마감질》로 결국 작업을 끝내곤 했습니다.
1970년도 후반에, 퍼포먼스의 끝을 알렸습니다. 1980년도 초에 대안적 공간으로 선술집을 생각했습니다. 장면과 조명 연출로 검은 병을 변환해여 연극처럼 꾸몄습니다. 연극은 회화적이거나 조각적 행위로 대체되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예술계에서 모든 것은 바뀌었습니다. 혼성이 어디에서나 가능한 흥미로운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의 구성에 관한 정치적인 접근으로 가고시안과 애플사의 사이에 갤러리들이 수없이 위치해 있습니다. 난 1980년대에 카메라를 이용한 퍼포먼스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난 구조물의 내부를 촬영하기 위해 장식을 했습니다. 《퍼포먼스-연극》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처음에 건축물, 지붕이 없는 창문과 문이 달린 작은 집으로 닫힌 공간이었습니다.

당신은 또한 피노키오나 해양의 선장에서 의상을 요구하면서 관객의 참여를 유도 하지 않나요?

당신이 관람객에게 요구하는 순간은 작품의 일부입니다. 협력하고 참여하는-관객과의 거리를 가깝게 하고-방식이며, 작품내에서 관객을 암시하는 방식입니다. 피노키오 에서 가면을 쓰는 것은 머리 주변에 환경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눈 주변을 뚫는 것은 사람들이 보이도록 창을 내는 것입니다. 보세요, 우린 모두 피노키오의 안에 있습니다...

타락과 매혹

《주머니 인간을 열다》는 퍼포먼스나 설치작업에서 신체에 관하여 자주 등장하는 요소입니다. 주머니 속에서 무엇을 찾습니까: 친숙한 구조, 문화적 매체, 혹은 카오스입니까?


주머니 인간처럼 인간의 피부입니다 : 신체의 개방과 관련한 타부입니다. 내가 15세, 16세 즈음에 헨리 무어의 조각은 매우 존재감이 강했습니다. 헨리 무어 버전에서는 신체에 구멍이 있었습니다. 1958년 나로서는 그것은 존재감에 관해 질문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되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겁니까?  보다 예전의 1960년대의 작업을 고려한다면 바닥에 구멍을 뚫고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항상 외부와 내부의 사이에 관심을 두었죠.

무의식 상황에서 작업하는 것이 중요한가요?

네. 하지만 그것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작업과정의 속을 들여다보면 피할 수 없는 것이죠. 1990년대 초기에 내가 조각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때에 따라 즉각적이고 늘 변했습니다. 디즈니에 영감을 받아서 페티시적 오브제에 접근하였었습니다. 유리섬유로 된 디즈니 인물들은 지나치게 마감이 잘 된 듯합니다. 진정 디즈니랜드에 영감을 받은 조각을 하길 원했고, 그것을 현대의 조각이 되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디즈니의 그것과는 좀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디즈니의 의미를 보다 아래에 두고 있습니다. 토마토 헤드스파게티 맨 을 만든 후, 제프 쿤스의 조각을 재현하길 원했습니다. 그의 마이클 잭슨과 거품 말입니다. 이미 허구의 인물을 제작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이디, 뽀빠이, 크리스마스 아버지, 피노키오등등 말입니다. 결국 유명인들, 예를 들어 마이클 잭슨이나 마돈나같이 이미 그의 정체성이 뚜렷한 인물들을 이용했습니다. 난 보다 순화된 표현으로 1980년대 말에 마이클 잭슨과 앨런 캐프로우를 한데 모았습니다. 마이클 잭슨CD를 나란히 뒤덮은 작업은 앨런 캐프로우의 것이었습니다. 내 입장에선 아주 조촐하지만 상징적이었습니다. 당시 보존할 장소가 없던 탓에 누군가에게 양도했고 현재는 찾을 수 없습니다.

문화적 요소들을 타락시키는 것은 당신에게 주요해보이는데요...

쿤스의 작품을 재현하면서 마이클 잭슨과 쿤스의 조각을 동시에 캐리커쳐한 것입니다. 난 머리, 손, 발과 꽃 따위의 단계에서 성장했습니다. 쿤스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만큼이나 흥미로웠습니다. 이 조각을 실현하기 위해서 세부적 마감 전에 전체적 형상을 위해 이끼와 진흙을 사용했습니다. 이끼판을 구상했었습니다. 그것은 구겐하임의 것과 비슷했죠. 이 단계에서 전 진정으로 즐겼습니다 : 아직 가공전의 작품, 진행 중인 그것말입니다. 그것은 추상입니다 : 작품을 멈추는 것과 과정을 멈추는 것, 마침표를 찍는 것은 동시에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또한 인간적 형상을 가진 기계적 조각을 합니다.

모든 것은 1980년대 초기에 바이에른 킥 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의 초기까지  가디안 으로 이어졌습니다. 꿈꾸는 돼지 는 이런 맥락입니다. 돼지 섬 이란 거대한 작품을 실현시킬 프로젝트 는 현재 5년가량 진행해 온 것입니다. 지금은, 새로운 장에 왔습니다. 작품의 어떤 인물은 진실이며, 다른 인물은 보다 추상적이거나 변형되어서 걸죽하게 뒤섞인 것같습니다.

당신이 《추상》에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변형입니다. 형태에 반하는 것, 다시 조정하며 변성시키는 것입니다. 돼지로 분한 사람이나 사람으로 분한 돼지가 모호해지는 것입니다. 돼지 섬은 거대한 플랫폼입니다. 우린 플랫폼위에 있습니다. 오브제에 다시 접근하고 해체하는 데에 시간을 보내며, 초콜렛이나 밀납으로 주조물을 만들고 다시 만듭니다. 그것은 진행중인 흐름이죠. 그것이 끝나보일 때 조차도, 항상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으며 다른 것으로 진행 중입니다. 우리가 제로에서 다시 사작하는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조차도 우리 각자는 그것이 끝났거나 거의 끝났다고 믿습니다. 과정 속에서 작품은 진화합니다. 왜냐하면 진행 중에 잔여물은 항상 쌓이기 때문입니다. 의도는 없지만 의지는 있습니다. 의도는 항상 반-의도가 되고, 형상은 영구적인 변화입니다. 형상은 건축물처럼 자랍니다. 사전적 의미의 섬이 아니라 플랫폼이나 장면으로 된 이끼의 집단이란 의미에서 섬입니다. 여기엔 두가지 층위가 있습니다. 가끔 난 소규모-공장이라고 말합니다 : 조각을 하긴 하지만, 산업공정에 따르죠. 기계화하도록 하지만, 결과를 보증하는 어떠한 확신도 없지만 계속해서 섬을 유지합니다.


예술가와 광대

그렇다면 공기주입 조각인 돼지를 작업의 확장으로 볼 수 있나요?

모든 공기주입 조각은 애초의 기준이 있습니다. 이전의 작업한 내 작품을 반영하도록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그것은 1990년대 초기에 금속과 판재로 된 변이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보다 대규모의 오브제를 추상화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12-25센티미터의 작은 오브제가 17미터 크기로 커진 것은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브제를 다시 재현하는 것 이상입니다. 공기주입 조각은 바이브레이터나 변무더기 이상의 것입니다. 변무더기는 풍경입니다. 공기주입된 추상작업이죠. 15미터 보다 더 놓게 비닐로 된, 공기가 차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마도 그 내부나 주변을 걸어다닐 수 있을 것입니다...그 작품은사물들을 결정짓는 방식이나 재현방식에 대해 말합니다. 조각은 바이브레이터 이지만 바이브레이터가 아닙니다. 우울한 추상입니다 : 주머니. 그것은 기념비입니다. 신체이기도 합니다...유희는 존재인 척 하는 그것이나 존재인 것에 참여하며 이루어집니다.

당신은 종종 예술가로써 스스로를 광대로 규정짓는데요. 예술가가 광대가 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인가요?

1970년대의 퍼포먼스 예술가들에 대한 답입니다. 샤머니즘의 바탕을 둔 실험들을 하곤 했습니다. 난 광대란 말이 좋습니다 : 문화 비평적인 의미에서 광대말입니다. 레니 브루스와 그가 가진 인터뷰에 흥미가 있습니다. 그는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을 위해, 그의 공연을 번안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미국 법적구조에 대해 비판했고, 문화와 언어에 대한 비평이 그의 작업의 중심이었습니다. 나는 1970년대의 말에서부터 198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일관성이 없는 잠재의식의 이야기를 계속 했었습니다. 난 광대의 역활을 좋아했습니다 : 광대와 서커스 말입니다. 할로윈에 입었던 의상으로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은 광대의 옷이었습니다. 노랑색, 초록색, 빨간 털방울이 뾰족한 모자에 달린 것이었습니다. 내가 기억하기론 내 친구가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 난 웃었고 옷에 오줌을 지렸습니다. 내 오줌이 허벅질르 타고 흘렀어요. 당시의 순간을 의상에 반영하고 싶었습니다 : 다른 인물이 입을 것이었지만, 의상을 다시 제작하였습니다. 광대의 의상을 입고 안에 소변을 누도록 지시했습니다...하지만 우리가 싸라고 하면 금새 못싸듯이 작품은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1945년   솔트레이크 시티 출생
            캘리포니아 거주. 아틀리에
2007      Head Shop/Shop Head, S.M.A.K. , Stedelijk Museum voor Actuele Kunst, Gand ; The Essl Collection, Tokyo Santa, Viennem / AT ; Air Born/ Air Pressure, Musee de sculpture Middelheim, Anvers ; Paul McCarthy- Damon McCarthy.
Portfolios, galeris Hauser & Wirth, Zurich




출처:  ARTPRESS N ˚336
기사:  Christophe Kihm
번역:  Plongeur (zamsoobu)

  1. 아리스티드 마욜 [Aristide Maillol, 1861.12.8~1944.9.27] 요약 프랑스의 조각가. 알찬 마스(masse:量塊)와 신선한 정감표출로 단아한 나부상(裸婦像)이 유명하다.[출처] 아리스티드 마욜 [Aristide Maillol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2. panamarenko(본명: Henri Van Herwegen)1940년 엔트워프 출생아상블라주 설치 작가. [본문으로]
  3. 칼 안드레 [Carl Andre, 1935. 9. 16~] 요약 미국의 미니멀리즘 조각가. 조각은 반드시 수직성을 가져야 한다는 관념을 깨고 수평조각의 개념을 도입하여 조각에 대한 놀라운 인식 전환을 가져왔다. 바닥에 정방형으로 똑같은 크기의 철판을 깔아놓은 작품으로 유명하다. [출처] 칼 안드레 [Carl Andre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4. joep van lieshout.1963년 네덜란드 라벤스타인 출생.디자이너, 건축가, 설치미술가. [본문으로]
  5. Franz West(1947-) [본문으로]
  6. 1927. 현대미술가. '해프닝'의 창시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