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monde Moulin레몽 물랭_사회학자_인터뷰


《레몽 물랭은 항상 예술 연구에 있어 본보기가 됩니다. 주제를 분석할 때 알아듣기 쉬운 정보에 기반하며 주제의 세부사항을 기준으로 합니다.  그녀의 저술은 사회학의 모델이며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명확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분명히 20세기 후반기의 가장 위대한 사회학자 중의 한명입니다.》 이러한 찬사를 누가 했는 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금세기 위대한 사회학자인 하워드 베커가 한 말이라는 것만 알아두자. 레몽는 이러한 평판에 어울린다. 그녀는 새로운 규범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 예술 시장의 사회학이 그것이다.
 레몽 물랭은 우편접수원인 아버지의 슬하에서 프로방스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사회적 사슬에 귀속되지 않았다. 그녀는 가족의 사회적 지위나 중산층 출신성분에서도 아닌 특징을 지닌다. 대학에서 불합격한 과거를 되니이며 그녀는 종종 슬프기조차한 누더기옷에서 우아하게 존재한다....그녀는 철학자를 희망했지만, 역사학위를 취득하고 예술사 분야에서 교사자격을 취득한다. 《그게 맘에 들었습니다. 내 생애에서 제일의 인물은 다비드 드 미켈란젤로였습니다》, 웃으며 말한다. 그녀는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 여인을 주제로 고등교육 학위를 가졌지만 고고학에 보다 집중하고 있다. 예술가의 조건에 대한 연구 끝에 그녀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프로방스의 소시민의 소박하며 천진난만한 낭만적 경향》이라고 말이다. 그녀의 이런 주제는 예술 시장에 대한 연구를 하는 사회학자 레몽 아롱[각주:1]의 관심을 끌었다. 1957년 그녀는 CNRS(국립 사회과학 연구소)에 들어간 후, 그녀의 이론에 힘을 실어주는 연구들을 축적했다 : 프랑스의 회화작품 시장. 그녀가 이 방대한 조사를 시작한 시기에 이 분야는 거의 불모지였다. 막스는 예술가를 노동의 분업에서 벗어난 유형이라 설명한 이후에 예술은 프랑스 사회학자들에 의해 간과되었다. 에밀 뒤르켐[각주:2]은 사회 미학에 길을 열었다. 피에르 부르디외[각주:3] 는 소비와 생산과 교육에 보다 집중하였다. 그에 반해 그녀는 스스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바탕을 가지고 있음에도, 개개인의 사회적 소유물이란 관점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더이상 보편적인 사고 체계나 일반적 유형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았다.
 
 일화와 치밀하게 구성된 개념을 결합하며 그녀는 일반화의 화두를 던진다.《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활동과 상호작용, 변이, 상황과 정열의 체계입니다. 그녀의 연구의 핵심은 민족학적 가치와 민족 간 개별적 유형입니다.》사회학자 피에르 미쉘-망제는 이렇게 밝힌다. 《그녀는 거의 최초로 확신을 진전시키는 방법을 압니다. 그녀의 분석이 힘을 가지는 이유는 헛점이 드러나지 않고 객관성을 가지기 때문이죠. 사회학자들에게서 흔히 드러나는 고발하는 어투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는 동일한 잣대아래 모든 요소를 판단하려하거나 하지 않고, 적절한 거리를 찾았습니다》
 레몽 물랭의 작업에서 핵심요소는 두말할 것 없이 그의 주제에 대한 애착이라 할 수 있다. 비관주의와 무관한 명석함은 주요 예술가들과의 만남을 가능케 했다. 예를 들어 장 뒤뷔페[각주:4], 다니엘 코르디에[각주:5], 칸바일러[각주:6] 등이다. 《작품 수집가들은 나를 엘리트라고 여깁니다. 왜냐면 자기편으로써 내가 가난하며 정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바깥에서 설령 외식하고 있는 날 발견하는 것을 보고싶어하지 않겠죠》그녀가 웃으면서 말한다. 《예술가들이 생각하기에 내가 그들의 작업을 존중한다는 것은 보다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작업을 끝내지 못할 때 그들은 사회학이나 경제학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이 잘 돌아가면, 그들은 철학자가 되고 싶어할 겁니다.》

예배당의 논쟁에서 동떨어진

 그녀가 가진 심리학적인 정교함은 공손함으로 배가되어 프랑스 사회학계에서 그녀의 존재를 뚜렷하게 하였다. 바로 교회와 사제에 의해 독점되어 온 곳이자 참호나 법정에 가까웠던 곳에서 말이다. 《부르디외는 사회학분야의 헤게모니를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레몽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그녀의 방법론은 이해관계를 떠나있기 때문에 값비싼 댓가를 치러야 했다》, 라고 알랭 크맹[각주:7]은 지적한다. 아니 코헨-솔랄[각주:8] 은 그녀에 대해  《체제의 빈 틈사이에 침투한 전형》이라 말한다. 정치적 태도나 여성성의 감정없이 이 온화하고 중용의 성정을 가진 그녀는 아롱에 의해 창설된 유럽 사회학 센터의 보안 담당자로 임명된 이후에 1984년 프랑스 사회학자 협회장으로 위임되었다. 또, 뱅센지역에 위치한 좌파진영이 우세한 대학에서 사회학부를 지도하였다.
 《그녀의 작업물은 얄타 논쟁으로 분류할 수 없습니다. 부르디외의 도움으로 출간하였지만 어떠한 정치적 성향이나 잣대를 적용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는 사회학계의 생태계에 대해 신중한 자세를 취합니다. 어떠한 일반화도 없이 그녀의 존재는 독점적인 체계에 백신으로 작용합니다》라고 피에르-미쉘 망제는 강조한다. 유형의 가장자리에서 그녀는 규범을 재조정하며 경제학자의 옹색한 면모를 밝힌다. 1992년 출간된 저서,예술가로써 바라본 정부기관과 시장 에서 정부기관과 시장 사이에 예술의 적응단계를 분석하였다. 《레몽의 영향은 예술 사회학을 고려하는 그녀의 방식입니다. 사회학이 너무 격식을 차려서 예술에 접근할 필요는 없지만, 객관적으로 해야 됩니다》라고 알랭 크맹은 주장한다.  《그 이전에 예술사회학은 미개발 분야였습니다. 현재 그녀는 문화 사회학을 구성하는 기둥입니다.》

지위에서 오는 권력
 
그녀가 비록 거대한 성당에서 떨어져 그녀만의 성을 세웠음에도 일반적으로 철학에 대해선 간단하지 않다. 특별히 제자들 앞에서 그렇다. 그녀는 학생들이 존경하며 따르는 편이 아니다. 에릭 트롱시는 이렇게 말한다《그녀는 대상을 볼 때 열정적인 동시에 감정을 배제하여 보는 방식을 보입니다. 내가 모노크롬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몽마르트 학파의 회화는 숲 속에 애첩을 그려넣은 이후에 더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호기심이 왕성합니다. 그리고 잘 알려진 역사와 그렇지 않은 사실을 훌륭하게 연결시킵니다. 만약 향후 제가 데이비드 해밀턴이나 베르나르 뷔페를 전시하면 그녀의 조언대로 진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파를 조성하기 위해 애쓰기보다, 그녀는 보다 생동하는 개인성에 침잠한다. 그녀의 위치는 역설적이다. 《그녀는 신화적인 동시에 그녀의 존재를 부각시키기를 거부합니다. 그녀는 전방위에서 항상 인용됩니다. 아직 영어로 번역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라고, 아니 코헨-롤랄은 상기시킨다. 그녀의 남편 피에르 카를로의 고무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세대교체에 실패했다.
 그러나 그녀의 연구는 어떤 거부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거의 예감에 가까운 방식으로 개념화된 이런《역동적인 상인》의 개념이나 《끊임없는 회오리》의 개념은 현실 이상의 것이다. 하워드 베커[각주:9]는 이렇게 말한다.《그녀의 분석력은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실을 구축하고자 함이 아니라 보다 가까운 변화에 대해 이해하도록 해결의 열쇠를 주고자 함입니다. 사실 그녀가 기여한 바는 프랑스 예술 시장에 대해 언급함 것 뿐 아니라 세계의 영구한 변화에 대해 인지하도록 수단을 제공한 것에 있습니다. 그녀의 저작은 예술의 죽음을 선고하며, 예술이 적합성을 빠르게 잃고 있다고 단언하는 견고한 이론에 반하여 시간을 초월합니다》
 
 비록 그녀는 행동파는 아니지만 현실에서 발 붙이고 있다. 물론, 그녀의 최신작은 경험주의 연구보다 에세이가 주로 차지하고 있다. 《난 우유부단한 사람이거나 완벽주이자입니다. 난 차이의 전문가입니다. 하지만 다독가는 아닙니다. 일종의 환심을 사기 위한 행위입니다. 난 스스로 자극받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동요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의 지인은 그녀의 미탐험지대인 아카이브 주변에서《동요하다》라는 단어를 즐겨본다. 피에르-미쉘 망제는 아르 브뤼에 관한 저서에서 이 단어를 차용하려 한다. 이 문제로 플라마리옹 출판사가 인터뷰를 수록한 저서와 조정 중에 있다. 왜냐면 아니 코헨-롤랄이 말하듯이, 《레몽은 폭풍》이기에.

레몽 물랭
1924   물랭 출생( 알리에)
1957   CNRS에 참여
         프랑스의 회화 시장  출간, 미뉘 출판사
1973   건축 출간, 칼만-레비 출판사
1992   예술가, 정부기관과 예술시장 사이에서, 플라마리옹 출판사
1995   예술의 가치, 플라마리옹 출판사
2009   예술 시장. 세계화와 새로운 첨단기술, 플라마리옹 출판사

         

출처: LE JOURNAL DES ART N˚339. 2011.01.21-2.03 
기사: Roxana Azimi
번역: zamsoobu ( Plongeur )

  1. Raymond Aron (1905-1983) 파리 출생. 1924년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런던에서 드골의 자유 프랑스(La France Libre)운동에 참가, 같은 이름의 기관지 주필이 되었다. 전후 J.P.사르트르 등과 함께 잡지 《현대 Les Temps modernes》(1945)를 창간하고, 《콩바 Combat》 《피가로 Le Figaro》 등 잡지의 논설 기자로 활약하였으나, 후에 사르트르와 결별하고 반마르크스주의로 일관하였다. 1957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어 사회학을 강의하면서 마르크스주의적 경제사관의 비판, 공업화사회의 분석 등에 관한 저서를 발표하였다. 주요저서에 《현대독일사회학 La Sociologie allemande contemporaine》(1935) 《지식인들의 아편 L’Opium des intellectuels》(1955)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Démocratie et totalitarisme》(1965)《회고록》(1983) 등이 있다. [출처] 레몽 아롱 [Raymond Aron ] | 네이버 백과사전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2. émile Durkheim (1858-1917)프랑스 사회학자. 교육학자. 프랑스 근대사회학의 창시자. [본문으로]
  3. Pierre Bourdieu (1930-2002) 사회구조를 개관적으로 분석하는 관점을 고수하면서, 사회학적 방법론과는 거리가 먼 문화예술 현상에도 관심을 가지고 미학적 인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어가는 방식 등에 관한 저서를 잇달아 발표했다. 1970년에는 학교의 독립성과 중립성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내용을 다루면서 구조와 행위의 통합을 꾀한 역저 《재생산》을 출간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출처]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4. Jean Dubuffet (1901-1985) 프랑스 화가. 아르 브뤼, 즉 원생미술이란 용어를 창시. [본문으로]
  5. Daniel Cordier (1920-) 장 물랭의 측근이자 협력자. [본문으로]
  6. Daniel-Henry Kahnweiler, (1884~1979) 독일 태생의 유대인 화상·미술평론가. 입체파의 예술성을 간파하고 입체파 화가들을 후원하였다. 수집한 입체파 작품들을 일반에 공개하여 입체파가 당시를 대표하는 전위적 예술로 자리매김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출처] 칸바일러 [Daniel-Henry Kahnweiler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7. Alain Quemin (1967-) 프랑스 사회학자 [본문으로]
  8. Annie Cohen-Solal 알제리 출생의 사회학자 [본문으로]
  9. Howard Becker (1899-1960) 미국의 사회학자로 사회행위이론을 사회변동론에 적용하여 미국의 이론사회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주요 저서로 《조직사회학》등이 있다. [출처] 하워드 베커 [Howard Paul Becker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