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and Humour (10)_ 벨기에식 농담 ⓐ

벨기에식 유머는 분명 있다. 그것은 아이러니를 담고 있는 프랑스와 차이를 둔다. 벨기에인은 사람을 조롱하지 않는다. 그렇게하지 못한다. 그들의 막연한 언어는 프랑스-플랑드르어가 혼합된 것으로 분할된 국토, 몇 세기 동안 이어진 외세 침략(스페인, 오스트리아, 프랑스, 네덜란드...)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 까닭에, 겸허함을 일으키게 한다. 


벨기에는 정부의 부재 아래, 참수된 채 달리는 수탉처럼 일년을 보냈다. 무정부의 벨기에는 건재하다! 내각은 무엇을 하는가? 왕정이 어떤 점에서 더 나을 것인가? 독실한 카톨릭교도인 보두앵 왕이 실패의 긍정안을 거부하며 물러나겠나? 다음으로 누군가 왕좌에 올랐다. 바로 채플린 Chaplin이 가리킨 위비 Ubu 와 이오네스코 Ionesco 이었다. 권력의 이동은 쥴 세자르 Jules César[각주:1] ( 《Fortissimi sunt Belgae》 ) 에게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샤를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 는 불쌍한 벨기에인 Pauvre Belgique! 라는 말로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그리고 강하게 말하였다 : 《 그렇게 이상한 종족은 없을 것이다. 벨기에 인만큼[...] 》

태생적인 초현실주의의 나라
벨기에는 1830년 프랑스와 독일이란 강대국 간의 완충역활을 위해 건설된 국가이다. 오페라의 밤이 시작되면 브뤼셀에서는 혁명이 시작된다. la Muette de Portici 의 연주도 들린다. 《자유를 위해! 》이나 《우리에게 치즈를! 》을 외치는 침묵의 소리가 길가에서 들린다. 이 구호들이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네덜란드 통치시대였다...벨기에는 늘 분리될 위험이 잠재된, 서둘러 접착시킨 테가 나는 나라이다. 벨기에식 유머는 잘 알려져있다. 거기엔 샤샤 기트리 Sacha Guitry [각주:2]의 정수가 담긴 단어는 없다. 또, 앵글로-색슨이나 부르봉 왕가의 귀족정치라 부를 만한 것도 벨기에에는 없다. 
 19세기 중반 , 바빌로니아 법원 babylonie Palais de justice 건설 이후에는 마롤 Marolles지역에 사는 벨기에 서민들은 주거지를 강제로 옮겨야했다. 그들은 이 거대한 기계를 모욕적인 말로 깎아대렸다. 그리고 이 거물단지를 지은 요셉 폴라에르 Joseph Poelaert[각주:3]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건축가같은! 》이는 상부에서 내린 명령을 고집스럽게 복종하는 것에 대한 증오심이다. 하지만 이것도, 벨기에 현대 예술의 《 얼간이 》스타일에 비하면 놀랄 것도 아니다. 사실 미쳐가는 건축가...빅토르 호타 Victor Horta [각주:4]오줌누는 동상 Manneken-Pis 를 보면 벨기에식 정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무의식의 환상 옆에, 세계 유일의 오줌누는 동상을 세운 것이다.


벨기에식 유머는 스스로를 조롱한다. 피터 브뤼겔 Peter Brugel[각주:5]은 도시를 뒤집어보기 위해 채소밭 언덕에서 물구나무를 서기도 하였다. 그는 죽었을 지도 모른다...그러한 시도는 생각이나 관점이 혼란스러워 질 수 있는 위험이있다. 벨기에의 가장 멋진 농담은 시공간을 넘어 사고하는 벨기에인들 스스로 만든 것이다 :《벨기에인은 파리 북역에서 나와, 파리에 사는 친구에게 이런 충고를 한다. 이 잔혹한 도시에서 아는 체 하지 말고 갈길이나 가라. 또는, 당신이 눈에 보이는 첫 음식점으로 들어가 바에 턱을 괴고 이렇게 주문해 "뭐 진한 것 좀 주세요" . 깜짝 놀란 점원이 이렇게 말하지. "당신 벨기에 인이시죠?""네, 그런데 어떻게 알았소?""그게..여긴 은행입니다. 손님"》벨기에인은 밤 중에 빛나는 고속도로에서도 면제된다! 이런 멋진 역설은 필립 글뤽 Philippe Geluck 의 일러스트에 잘 표현되어있다. 그의 고양이 는 두 개의 표지판이 서로 다른 갈림길에 다다른다. 처음은 《 모든 방향 》, 그리고 두번쨰는《다른 방향》, 영원히 길을 잃게 하는 것이다.

어떻게 벨기에에서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자가 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곤 하는 데 :《자, 물병에 넘치는 물방울이다!》또는《울트라 기둥서방이네!》아니면《불편한 듯한 팔베게를 베고 잠에 들다》라는 식의 말이다. 어떻게 라캉의 이론보다 천배나 빠르게 퍼지는 벨기에 농담들 속에서 당신을 정의하겠는가 :《두 명의 노인 친구가 나란히 앉아있다. 첫 사람은 그의 주머니에서 거울을 꺼내며 이렇게 말한다 : "봐, 내가 잘 알고있는 사람이네, 그런데 누군지 모르겠어." 그의 친구가 거울을 뺏으며 말한다 : "네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바로 나잖아! "》 이상한 이야기는 벨기에의 전통이며 제롬 보쉬 Jérôme Bosch[각주:6] 와 피터 브뤼겔이 그 속을 채워나갔다. 선의는 재주넘기를 하고 외설스러움은 식도락적 환상으로 보다 누그러진다. 벨기에식 유머는 친근하다. 뵐르망양의 결혼 le Mariage de mademoiselle Beulemans 를 보라, 이 작품은 맥주집을 배경으로 브뤼셀 풍습을 담은 코메디 걸작이다. 도시 중심가에 위치한 카페의 별명은 이렇다.《돌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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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Beaux Arts Magazine N.326 , 2011.8
기사 : Pierre Stercks
번역 : PLONGEUSE ( zamsoobu )
  1. Général, homme politique et écrivain romain. [본문으로]
  2. Sacha Guitry, 1885.2.21~1957.7.24] 요약 프랑스의 배우·극작가·영화작가. 뤼시앵 기트리의 아들이다. 작품은《베르그 오프 좀의 탈취》(1912),《어느 사기꾼의 소설》등이다. 성공한 자작을 영화화하고, 로댕, 르누아르 등의 기록영화를 시도했다[출처] 사샤 기트리 [Sacha Guitry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3. Born in Brussels to Philip Poelaert (1790–1875), a former architecture student at the Académie Royale des Beaux-Arts in Brussels, Poelaert also trained there under Tilman-François Suys, and then in Paris under Louis Visconti and Jean-Nicolas Huyot. Poelaert first came to attention with his winning competition entry for the Congress Column in 1849. He was made city architect of Brussels in 1856. Poelaert's most significant commission was the colossal Law Courts of Brussels, the largest single building constructed in the 19th Century, admired by Adolf Hitler, and even copied in smaller scale at the Palace of Justice in Peru. During construction the inhabitants of the Marollen quarter, the working-class neighbourhood site of the Law Courts, gave Poelaert the nickname “Skieven Architect” (roughly, ‘the crooked architect’) because the long period of construction drove many inhabitants out of their houses, with the help of the local police. The nickname refers also to "chief architect" because many of the workers of the Law Courts were English. The local inhabitants corrupted "chief architect" to "skieven architect", with a totally different meaning in the Brussels dialect.[citation needed] We remember here that Poelaert himself was residing in the heart of the Marolles rue des Minimes in a house adjoining his vast offices and workshops and communicating with them.[1] Poelaert Place, the largest square in Brussels, lies before the courts building. He is buried in Laeken Cemetery under a miniature version of his own Palais de Justice. Poelaert was the great-uncle of Belgian architect Henri Van Dievoet. [본문으로]
  4. 빅토르 오르타 [Victor Horta, 1861.1.6~1947.9.8] 요약 벨기에 출신의 아르누보(art nouveau) 건축의 대표자로, 재료와 구조의 성질에 충실한 조립에 의존하는 ‘기능주의’를 채용했는데, 대표작으로 브뤼셀의 《튜린가(街) 12번지의 집》, 《미술관》 등이 있다. 국적 벨기에 활동분야 건축 본문 ‘아르누보(art nouveau)’ 건축의 대표자이다. 브뤼셀의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신고전주의의 건축가 바라의 사무소에서 일한 후, 1886년경부터 독립하였다. 19세기 말 벨기에의 아르누보 운동은 후대에 강한 영향을 끼쳤지만, 오르타는 벨데와 같은 의미에서 재료와 구조의 성질에 충실한 조립에 의존하는 ‘기능주의’를 주창하였으며, 아르누보적인 표현수법 창작에 우수한 작가였다. 그 표현의 특색인 자연미의 형식화에 의한 곡선 구성에서는 뛰어난 작례(作例)를 보여주었다. 1893년 브뤼셀의 《튜린가(街) 12번지의 집》을 독창적인 수법으로 설계하고, 연이어 작품을 거듭할수록 견실하고 순수한 작풍을 개척하였다. 브뤼셀의 《민중의 집》(1896∼1899) 《미술관》(1921∼1928) 등은 아르누보를 기념하는 대표작이다. 1913년 브뤼셀예술협회장이 되었고, 후에 남작 작위를 받았다. [출처] 빅토르 오르타 [Victor Horta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5. Pieter Bruegel (Brueghel) the Elder (Dutch pronunciation: [ˈpitəɾ ˈbɾøːɣəl]; c. 1525 – 9 September 1569) was a Flemish renaissance painter and printmaker known for his landscapes and peasant scenes (so called genre painting). He is sometimes referred to as the "Peasant Bruegel" to distinguish him from other members of the Brueghel dynasty, but he is also the one generally meant when the context does not make clear which Brueghel is being referred to. From 1559 he dropped the 'h' from his name and signed his paintings as Bruegel. [본문으로]
  6. Hieronymus Bosch (English pronunciation: /ˌhaɪ.əˈrɒnɨməs ˈbɒʃ/, Dutch: [ɦijeːˈɾoːnimʏs ˈbɔs]; born Jheronimus van Aken Dutch pronunciation: [jeɪˈɾoːnimʏs vɑn ˈaːkə(n)];[1] (c. 1450 – 9 August 1516), was a Dutch painter. His work is known for its use of fantastic imagery to illustrate moral and religious concepts and narratives.[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