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dav Lapid 나다브 라피드 인터뷰/cahiers Du cinéma카이에 뒤 시네마/2021.

하늘, 땅과 틴더

시노님Synonymes 은 파리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요. 다시 이스라엘에서 영화를 찍는 건 어떤 느낌이었나요?

시노님Synonymes 때 파리에 첫 도착을 하는 씬을 생각한 건 아닙니다. 그때 다음 영화는 이스라엘에서 찍을 것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2018년도 편집을 하는 동안 어느 이스라엘 학예사로부터 초대를 받았어요. 남부 지방이었는데 와서 상영회에 참석해달라는 제안이었죠. 하지만 마음 속으로 검열이 있을 거란 생각을 했어요. 당시에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광기였죠. 마치 인간이 살 수 없는 먼 우주의 행성같이. 이후에 친어머니(에라 라피드 Era Lapid 나다브 라피드의 첫 장편부터 다음 두편의 영화와 다비드 펠로브 David Perlov 의 영화 편집책임을 맡은)가 아프셨는데 병세가 급격히 안좋아지고 있었어요. 이미 영화는 있으니; 시나리오만 쓰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에 촬영을 해야만 하지만 무언가 다른 것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시노님 이후에, 아헤드의 무릎 같은 영화는 찍으면 안되었어요. 바깥 세계로 더 나아가야 했지만 결국 이 이야기는 이 영화를 통해서만 할 수 있겠다 싶었죠; 완벽성과는 거리가 먼 영화. 조심스러우면서 모호한 성격의 영화요. 어떤 형태로 거치지 않는. 그래서 인물도 와이Y 라고 이름을 붙인겁니다. 이름을 만드는 것은 이미 그 인물의 전기를 말하는 것이니까요. 그것과는 멀리 하고 싶었어요.

 

감독님은 이스라엘을 동떨어진 행성처럼 이야기하시는 데요. 바네사 파라디가 사막 한가운데서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신을 보면 마이클 스노우의 La Région central 을 생각나게 합니다. 땅이 마치 다른 행성을 연상케 한다고 할까요.

네, 혹은 공상 과학영화같이요. 그런 모든 것들이 결국 아헤드의 무릎 영화는 멀리 다른 곳으로 떠난 한 남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거예요. 그 곳에서 괴물과 맞서 싸우는 인물이요. 자신이 괴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이 씬을 찍을 때 마음씨 좋고 무슨 의견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있는 바네사 파라디에게   이런 디렉션을 했죠; <<이 신에서 당신 음악에 맞추어 만물이 춤추는 걸 보게 될거예요. 내가 세상을 춤추게 할 겁니다>> 이 시퀀스에서는 정말 그러했어요; 우리가 음악을 끝까지 볼륨을 높이자 행성이 춤을 추었죠. 해도 마찬가지로.

 

이 아름다운 신은 갑작스러운 전화벨로 방해를 받는데요. <<아름다운 이미지>>를 일부터 깨는 듯한 인상입니다.

나는 모든 것은 어느 순간 아름답기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양은 Y보다 끝까지 가는 경향이 있지만, 스스로 자유로워지진 못하죠; 타란티노의 존 트라볼타가 아닙니다. 다른 씬에서 한 운전수가 자신의 아내 앞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오죠. 그건 다른 종류의 너그러움(혹은 질투) 이면서 프레임 안에 들어온 손은 자동차 안에서 봤을 때 뒤틀려보이죠. Y 는 이것을 <<비속함이 승리하는 행렬>>이라고 묘사하죠. 그 역시 당신이 말한 대로 아름다움을 막는 것, 장애물을 놓는 것일까요? 내가 보기엔 이 질문은 땅에 저항하는 그의 모습과 관련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막이란, 아름답던, 그렇지 않던, 사랑받기를 거부합니다. 우리는 그곳을 꿈으로 그리지만, 사막은 그런 우리를 엿먹일 뿐이죠. 그가 어머니에게 하는 말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죠, <<결국, 땅이 이기는 거야>>, 우리는 그것을 정치적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다른 차원이 있어요. 원하는 바를 할 수 있고, 저항할 수 있지만, 그건 큰 땅에 한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 이 영화 역시 땅에 지고 말았죠. 스스로 땅에 마음을 열지 않는 이상, 그 곳을 돌아갈 수 없는 겁니다.

 

첫 씬은 비가 오는 하늘을 보는 앙감샷인데요. 마지막은 비행기에서 바라본 부감 샷입니다. <<이스라엘을 마지막으로 바라본다>> 땅으로부터 도망가려다가 그로 인해 위안을 받는 것 인가요.

맞아요. 저는 그것을 산자와 죽은자의 시점으로 표현했습니다. 초월성을 이야기하는 셈인데 산자는 하늘을 보고 죽은 자는 구름을 건너 땅을 보는 게 제 상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진 않겠죠. 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과 땅을 내려다보는 것, 완전히 반대되는 두가지 입장입니다. 하늘을 뭉뚱그려 보여 주는 것은 첫 씬에서 창백한 하늘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땅은 세세히 보여주죠. 영화를 열고 닫는 것은 만남의 인사와 헤어짐의 인사를 하는 것이죠.

 

감독님의 영화는 풍경에 <<색채와 빛깔>>로 반대하는 듯합니다. 시노님Synonymes  그것과 상당히 다른데요.

노란 색을 피하고 싶었어요. 그러면 사막을 무슨 색으로 표현할 것인가? 저는 그 장소에 있고 싶지 않았던 누군가의 입장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런 게 시노님Synonymes 과의 유일한 차이점이 아닙니다. 나는 이 두 영화가 완전한 대칭점에 있다고 생각해요. 시노님은 젊음과 이동하는 것에 관한 영화이고, 이번 영화는 고정성과 더 이상 젊음이 아닌 것에 대해 말하는 거죠.

 

이 또한 아름다움에 대한 두려움아닐까요. 감독님 영화의 인물들은, 시노님Synonymes과 L’Institurice의 인물들은 <<밤의 경이로운 순간>>에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아침의 씁쓸한 순간>>에 있는 반면.

몸이 과거와 화해하는 첫 영화였어요. 과거씬에서 신체는 존재감을 과시하고 축제가 벌어지죠. 현재에서 Y는 몸이 없어요. 그에게 시각 뿐이죠. 그는 낙오감에 살고 있어요. 영화는 보다 무거운 영화죠 : 시노님에서 요아브는 얼마간 어렵게 살다가, 증권가나 정보통신분야에서 일을 하거나, 브루클린이나 쿠바로 이사하거나 하는 게 상상이 되죠.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게 없어요. 시노님보다 아헤드의 무릎이 훨씬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이죠?

더이상 과거의 낭만주의가 없기 때문이죠.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들 사이의 긴장감에 관한 영화입니다. 설명하자면; 영화는 정치적인 면을 이야기하긴 하지만, 보다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현실을 보지만, 정신은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어요. 우리는 땅과 하늘, 그리고 틴더 사이에 있어요.

 

영화는 아헤드 타미미 실제사건에서부터 Y가 더이상 영화를 찍지 않는 사막까지 아우르는데요. 야할롬 Yahalom 은 보다 현실을 다르게 보여주는데요: 그녀는 정확히 권력의 측면에서 보여집니다. 배우 Nur Fibak 누르 피박은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미리 레게브 Miri Regev 를 현실화한 것 아닌가요…영화 개봉당시 영향이 있었습니까?

이 영화가 칸에 선정되자 이스라엘에서 이미 개봉전에 이슈가 되면서 정부 대변인으로부터 공공의 적같이 표적이 되었어요. 정부에 매우 우호적인 한 기자가 내 영화 인물에 대해 언급을 했죠. 그는 보이코트를 하도록 부추겼고, 나를 유대인을 탄압하도록 나치에 협조한 유대인으로 비교하면서요. <<네가 어디 사는 지 알고 있다>>란 협박 전화도 받았구요. 동시에 올림픽 게임에서 메달을 딴 운동선수들은 문화부 측으로부터 찬사를 받았죠…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아헤드의 무릎에서 정치적인 부분은 많은 이들이 인식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그들에겐 이미 확실한 부분이니까요. 영화에서 보여지는 현실에 닌감한 사람들은 이렇게 : 어떻게 이런 살아나갈 수 없는 나라에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영향을 받는가? 지속적으로 숨 막히는 현실이 끝나지 않는다면? 그들의 삶의 진실을 마주하면서 매우 감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죠. 다른 영화에서는 전혀 보지 못한 부분이죠: 눈물, 동요 등등…한 이스라엘 작가와 프랑스 여기자는 니체의 한 문구를 인용했어요 :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는가 성찰이 필요하다. 심연을 바라보는 시선에, 심연 역시 상대를 바라보고 있으며, 자아에 침투한다.>> 이 문구를 확실히 이해할 순 없지만, 이스라엘 관객들에게 해당하는 건 맞아요; 정의가 공포가 되는가. 용과 싸우는 이들이 용이 되는 이야기. 확고한 존재와 싸우면서 땅, 하늘, 세상, 풍경을 더 이상 보지 않도록 뒤틀려버리죠. 집단의 재앙으로부터 자기 자신 개인의 재앙을 분리시키느라 투쟁해야 합니다. 어머니의 장례마저 문화부 기관. 총리부, 혹은 기자부으로인해 얼룩질 수 있는 겁니다. 개인의 장례가 개인의 것으로 남도록 싸워야 하는 거죠

 

감독님의 영화는 국가에 대한 분노를 보여주는 데, 한편으로는 그들의 한계나 위선도 보여줍니다. 야할롬과 지역 주민들이 <<착한 사람들>>로 묘사되잖아요; 음식을 만들고, 영화를 보거나…

물론이죠, 그들은 마치 상자 안에 인형처럼 상자를 열때마다 인형이 튀어오르는 같은 힘으로 눌러서 들어가게 하는 이치죠. 그들은 뭘 먹을까, 어떤 옷을 입을까를 생각하지만…상징과 이데올로기에 비해 단단하기 때문에 우위에 있게 되는 겁니다. 

 

이 두가지 힘의 대립은 에로틱한 관계를 만들어내는데요. 특히 카메라와 그렇습니다. 어떻게 진행한건가요?

에로티즘은 항상 거기에 있는 겁니다. 아주 섹슈얼한 영화라고 생각해요. 항상 내가 말하려는 바 ; 비비고 싶은 몸의 욕망. 하지만 카메라는 절대 그 욕망을 허락하지 않아요. 충족되지 않는 그 무엇같은 것. 나체신이 안나오는 첫 영화이기도 하지만 결국 신체적 접촉은 가장 중요합니다. 영화 끝에 요할롬의 자매가 Y 의 뺨을 터치하죠.

 

국가에 대한 증오는 그가 욕망을 체득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데요. Y의 모놀로그는 말을 잃게 합니다: 편집방식은 클래식하지만, 이후에 카메라는 얼굴에 갑자기 가까이 가는데요. 야할롬의 품에서 무너지기까지 말입니다. 

우리는 간단한 금속판을 이용해서 배우가 여배우에 가까이 가는 순간 잡도록 했죠.이 삼단구성은 그의 직감에 따라 움직이는 겁니다. 프레임을 잃을 수록 감정적이 되죠. 배우는 그가 느끼는 대로 연기를 하고, 필요함에 따라 움직이죠. 어느 정도 잭슨 폴록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화폭에서 자유로이 붓을 움직이는 방법이요. 우선 표준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파격으로 가는 것을 좋아해요 : 클래식에서 논-클래식으로…우파 정치에서 좌파 정치로, 또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요. 국가에 대해 이래저래 힘들다고 늘어놓다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거죠. <<나는 단지 국가가 나를 품어주기를 바랬어>> Y는 그가 조금만 말한다면 모두가 의식이 깨어 무릎꿇거나 더 나은 것을 하도록 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그 자신이죠. 국가가 아니라.

 

어떻게 긴 모놀로그를 쓰셨나요?

물론 시나리오 중에서 가장 시간을 많이 할애한 부분이예요. 매일 집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문장을 생각해냈죠. 날이 갈수록 점점 길어졌죠. 도움이 많이 된 것은 Thomas Bernhardt 를 다시 읽는 것이었는데, 그는 셀린과 제일 가깝다고 생각하는 작가입니다. 알렌 진스버그 Allen Ginsberg 를 많이 참조하기도 했어요. 점차, 이 모놀로그가 의미나 이성을 잃는 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단어들이 흩어지고 중심을 벗어나기 시작했죠. 나는 이 것이 단지 이스라엘 정치에 반대하는 것에 그치지 않기를 바랬어요. 별로 관심없거든요. 그렇게 독백이 시작되고 이후에 무너지는 겁니다.

 

영화에서 <<감정적>> 프레이밍을 말하셨는데요; 이러한 순간에 카메라는 독립적으로, 이른바 <<카메라=펜>>으로 작용한다고 보는데요. 감독님의 영화에서 점점 자주 적용되는 방식같은데; 어떻게 작업하시는 것인가요?

펜 이상이죠. 보다 카메라-붓 에 가까운 것 같아요. 보다 액티브하지만 때로 적확한 표현이 불가하죠. 만약 영화가 공상적이고 현실적으로 비춰진다면 그건 카메라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모르기 때문일 겁니다. 텍스트를 쓰지 않아야 할 필요가 있었어요. 카메라 감독인 샤이 골드만 Shai Goldman 과 나는 가까웠지만 매우 다른 스타일이었어요. 나는 보다 금붕어같이 매번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내게 영화란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는 코끼리 같은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고, 매번 내게 이미 찍은 것이라고 상기시켜주곤 했어요. 편집방법을 그에게 보여줄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죠 ; <<좋아요, 알겠어요. 간단한 거네요>> 그는 모든게 간단했어요, 모든 게 확실했죠. 그는 중심을 잡아주었어요. 촬영할 때 그가 프레임을 통해 인식하고 있다고 확신했어요 ; 머리에서 손으로, 손에서 카멜 손잡이로, 카메라에서 신으로. 가끔 그를 배우 대하듯 디렉팅을 주었어요. 카메라가 <<롤링>>하기 바로 직전에, 리듬에 대해서 말하곤 했죠 ; <<이거 기억하죠ㅡ 우선, 타-타-타, 이후에 진동이 있고, 이후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리고 나서 다시 진동이 있는 겁니다>> 그건 단지 고정 샷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하지만 나는 샷에 분명히 무언가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어요.

 

Synonyme에서 감독님이 요아브 역을 직접 연기하려다가 나이가 맞지 않아 시도하지 않았는데, 이 영화 Y의 역을 맡은 아브숄롬 폴락 Avsholom Pollak 의 연기가 인상적이긴 했지만, 감독님이 직접 연기할 생각이 있었나요?

언젠가 말하긴 했는데, 그 생각은 빨리 접었어요. 내 연기력 문제 뿐아니라, 이 배역은 인간의 유약함을 표현해야 했는데, 폴락이 서있을 때조차 그게 느껴졌어요. 그는 항상 입 속의 모래같은 감각을 가지고 있어요. 인생에 위급한 재앙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게 그럴만하기를 바래요 ; 그가 그런 점을 가지고 있었고, 내겐 없는 부분이죠. 나는 이스라엘에서 억센 풍파를 겪었고, 영화개봉을 할 때마다, 혹은 군대에서, 이 역을 하기에는 너무 굳어있었어요. 

 

이 영화는 요아브나 와이 의 전기를 완결했다고 보시나요?

맞아요. 이제 극중 인물의 나이대에 나도 다다렀어요. 이제 크게 소리지르는 법도 모르겠어요. 상관없게 되었죠. 우리가 일정 수준의 데시벨을 넘어설 때, 그게 100이던 10 000이던 숫자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나는 다른 멜로디를 연주하고 싶어요. 아헤드의 무릎에 관한 인상적인 비평을 봤는데, <<폭발적인>>,<<폭탄>>,혹은<<복부를 강타한 한방>>…하지만 나는 관객과의 시합에서 나역시 KO 패했다고 느낍니다. 같은 것이지요. 이제 운동종목을 바꿀 때인가봐요. 

 

페르난도 칸조 Fernando Ganzo 

8 12파리

 

출처 ;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éma/2021/09

불한번역 ; 잠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