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족류의 해/ 번역 카이에 뒤 시네마; 스퀴드 게임

 

 두족류의 해

이 번 해 말에는 거대한 화염이 휩쓸고 갔다. 넷플릭스의 한국 시리즈인 스퀴드 게임이다.자발적으로 고립을 원한456명이 수용소에 갇혀 스케일이 과도하게 부풀려진 아이들 놀이를 하게 된다. 최후의 생존자에게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상금이 주어진다 ; 하지만 낙오자는 즉각 처형, 대부분의 경우 총살,된다. 대서양의 한편에서는 지난 10월 21일 촬영 중인 알렉 볼드윈이 카메라 감독 헐리나 허친스를 총기사고로 살해하는 사고가 있었다. 아직 사고의 정황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미국 촬영장의 노동 조건이 플랫폼의 압박으로 인해 항상 숨가쁜 일정으로 진행되고 그 것이 얼마나 불안한지 짐작할 수 있다. 고전적 서부 영화에서, 낡고 녹슬은 작은 조각(그의 영화 제목은 녹RUST이다) 이 치명적 DIY를 진행하는 동안 아시아의 한편에서는 집단 학살을 스트리밍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점점 공간은 비어져간다.

 이 공존을 잔혹하게나마 요약하자면 ; 촬영의 인플레이션과 극장의 데플레이션으로 말할 수 있겠다. 영화나 시리즈는 점점 많아지지만, 그것을 볼 눈은 점점 줄어간다. 스트리밍 서비스의 콘텐츠가 증가하더라도 공식적 시청자가 극장 관객수를 보장하거나, 증가하는 데 일조한다고 볼 수 없다. 극장은 듬성 듬성 구멍이 나있다. 비록 자가 격리 기간이 끝나는 시점에 관객수가 늘 것을 예상한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스퀴드 게임 (사실 은둔의 이야기이지만) 은 넷플릭스에 엄청난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반면, 프랑스 극장 관객은 팬데믹 이전에 비해 20-30%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 말인 즉, 영화가 가상의 총알, 혹은 실제의 총알에 쓰러졌다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나 그들의 존재 방식이 새로운 시리즈를 파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스퀴드 게임은 우리의 머리를 강타하며, <<새로운 메세지가 있습니다>>의 신호로 끊임없이 현기증을 일으킨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즐기고 있다. 극도의 신 자유주의에 반하는 때문인가 ? 아마도 우리는 악마적 <<Fort Voyage프랑스 서바이벌 게임>>에 편안하게 안착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Prisoner  (Denis Villeneuve)  의 마땅한 처벌을 위해 싸울 수도 -이 시리즈의 경우는 반대라고 할 수 있지만-있겠다 : 영국 시리즈는 폭력 조차도 스타일로 소화시키려 하는 반면에 그 뒤를 잇는 한국인은 스타일을 위해 폭력을 해치워버린다. 기하학 도형이 새겨진 가면을 쓴 채 얼굴이 지워진 참가자들에게 그저 짓밟혀질 운명 만이 기다리고 있다.

두족류의 치명적 놀이공원에서 프로그램과 이야기는 서로 겨룬다, 마치 플랫폼에서처럼. 황동혁 감독의 시리즈는 선택하면서 넷플릭스는 그 플랫폼의 초기로 돌아간 듯 하다 : 어둡고 무거운 알레고리, 자기 비판의 세계화

스퀴드 게임은 봉준호 감독과 견주어 볼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쿨하게 잔혹한 태도, 무자비한 살육은적용한 박찬욱 감독을 떠올린다. 큐브릭의 카라오케 : 오렌지 메카닉, 풀 메탈 자켓 2001(배경음악 <<Le beau Danube bleu>>흰 바탕을 배경으로 공동 기숙사의 기상시간을 단순히  표현한) 혹은 Eyes Wide Shut (서양의 백만장자가 동물 가면을 쓰고 비뚤어진 성욕을 가진 관찰자로 나오는 이상한 에피소드를 예시로 들면)가 떠오른다. 단시 큐브릭은 세계화의 최후로 점을 찍기는  하지만.

이 시리즈의 잭팟으로 오징어 자켓이 붐이 일고 있다. 혹은 한국 어린이들이 땅바닥에 오징어를 단순화해서 그려진 기하학 도형을 따라 움직이는 놀이로  시리즈 안에서 볼 수는 없다. 넷플릭스의 두족류가 다른 한편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7개의 오스카 중 하나를 거머쥔 (넷플릭스는 2021년 가장 높은 성과를 올린 <<스튜디오>>라 할 수 있겠다) 이 도큐멘터리는 올해 최고의 다큐멘터리로 선정되었다 ; 피파 엘리히와 제임스 리드의 나의 문어선생님 La sagesse de la pieuvre 가 그렇다. 남아프리카 잠수부가 문어와 하루하루 교감하는 이야기이다.

 

최근에 넷플릭스의 두건의 대흥행이 두족류와 관련있다는 게 흥미롭다. 문어는 아니말리즘의 상징적 생명체 중에 하나(마지막 작품은 : 빈키안느 데프렛Vinciane Despret문어의 일생 Autobiographie d’un poulpe, 출판사 악트뒤쉬드ActeDuSud 이 되겠다.)이다. 비단 문어가 지능이 있다는 것 뿐 아니라, 그가 가진 9개의 뇌로 대안적 철학을 제시한다는 이야기이다. 아마도 문의의 문명은 한계가 없이 진행할 지도 모르겠다 : 반면 문어의 생명은 1년 남짓하다. 문어의 개체 수는 점점 줄어들 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포식 개체가 줄었기 때문이다. 이 또한 플랫폼의 운명을 상징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 황량한 바다, 해저 케이블을 타고 스트리밍 서비스로 이미지들은 빛나고 순간적으로-모든 픽션 콘텐츠는 체인화되어 생산되고 더 이상 위기를 맞을 필요가 없다- 확장하고 있다. 모두가 그것을 볼 필요도 없다. 단지 그들의 스펙타클 자체에 의미가 있다. 그 빛나는 섬광과 점멸이 동시에 보여지면서.

 

기사; 에르베 오브롱 Hervé Aubron

 불한번역; 잠수부

출처; 카이에 뒤 시네마 2021.12 #7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