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솔레르 PHILIPPE SOLLERS ⒝

PHILIPPE SOLLERS ⒜ 에 이어...

 

그에 대항하는 교회공동체

 

ㅣÉclaircie 에서, 나는 프랑스인들이 의식이 결여되면서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되었는지 사회적, 역사적으로 짚어보았다. 스페인이 왜 이 점을 생각하게 되었는지, 무엇이 이런 현상을 유발했는지, 그리고 무엇이 이런 통찰력을 가능케했는지에 대해서. 나는 어디에도 도발한 적은 없지만, 두 명의 자매와 상관이 있다. 그 중의 한명은 롤라 Lola 이다. 피카소는 바르셀로나에서 그녀를 사진으로 남겼다. 흰색 치마를 입고, 그의 남매를 유혹하는 포즈이다. 마치 함께 매음굴로 가려는 것처럼, 그녀는 아비뇽의 처녀들 Demoiselles d'Avignon 의 한명과 같은 포즈이다. 두번째 여인은, 콘치타 Conchita 이다. 그녀는 8세에 사망했다. 피카소 Picasso 는 그녀의 마지막 임종을 뎃셍으로 조그맣게 남겼다. 에바의 죽음을 남겼듯이...죽음...하지만 어떤 내면의 경험이 죽음이란 강렬한 경험에 비할 수 있을까?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피카소는 그림을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신과의 타협은, 일종의 《신》을 인용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가져야 하며, 무엇이 근본적인 욕망에 대한 것인지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들, 여신들과 관련있다. 에바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여인을 알고 있다. 올가 Olga 이다. 올가를 통해 피카소는 러시아 발레의 시대로 들어갔다. 모든 것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그리고 피카소의 아들, 파울로 Paulo 의 초상을 그렸다. 지루함이 이 작업을 늦추진 못했다. 그 다음으로, 피카소는 갤러리 라파예트의 출구에서 마리-테레즈 Marie-Thérèse 의 환심을 사려하였다. 당시 그녀는 17세였다. 그림에 나타난 것을 보라.

 그리고, 도라 마라 Dora Maar 라는 숭고한 존재를 볼 것이다. 조르쥬 바타이유 George Bataille 가 말했듯이, 그녀는 게르니카 Guerina 의 다양한 포즈들을 위한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그 역시 비극으로 끝났다. 피카소와 사귀는 건 위험했고, 그를 보는 세간의 평판이 안 좋았다. 앵글로 색슨족 국가의 여성운동가들은 그를 혹독히 비난했다. 한편, 이 여성운동가들이 비난의 표적으로 삼은 건 피카소뿐만이 아니었다. 프랑스 문인인 미셀 우엘벡 Michel Houellebecq 도 그 대상이었다. 그는 피카소의 부활인 듯, 그와 비슷한 행보를 밟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는 그가 몬드리안 Mondrian, 칸딘스키 Kandinsky , 추상화가, 그리고 샤갈 Chagall 까지도 좋아했을 거라 확신한다. 아마 내가 사람들에게 그 화가들의 여인들을 나열하라고 하면 매우 지칠 것이다. 어떻게 그 과거를 모두 들추겠는가? 티티엔 Titien, 와토 Watteau, 프라고나르 Frahonard 까지...? 피카소, 그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 그녀들이 거기에 있었고, 내 붓 아래 있었다. 마네는 모든 걸 이해했지. 매번의 붓질마다 명석함이 봇물이 터졌다고. 물론, 여성들의 신체는 조금 변형했지만, 조형적인 것이었다. 거기엔 음악적 리듬이 있어 ; 《난 에바가 좋아》. 이 목적은 두 명의 화가를 아주 급격히 동요시켰다. 마네 Manet 와 피카소 Picasso 는 꽃송이를 암흑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바로, 시선의 심연에 자리잡은 암흑, 죽음의 암흑으로 말이다. 이런 점에서, 다시 마네를 사랑했던 메리 로랑 Méry Laurent 으로 돌아와야겠다. 그녀는 화가의 죽음이후로, 그의 묘지에 매번 흰 라일락을 놓아두었다. 화가의 생전 어떠한 연인들도 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마네를 위해 했고, 그건 아주 놀라운 일이다. 달리 보면, 당신이 피카소 처럼 목신이었다고 하면, 이런 답을 얻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그녀 스스로 성적인 차이를 지녔다는 것이다. 이후에 피카소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프랑수아즈 질로 Francoise Gilot 는 마티스와 가까이지내려 하였었다. 그녀는 피카소를 난처하게 하려고 마티스를 좋아했다. 어느 하루 프랑스아즈 질로 Francoise Gilot 는, 엘사 트리올레 Elsa Triolet [각주:1] 와 아라공 Aragon 도 증언한 바 있는, 한 젊은 공산주의 화가로 끝난 피카소를 떠났다. 공산당 대회에서 나신의 토르소를 발표했다.

 라덱 Radek[각주:2] 과 다른 잉여인간들이 조이스를 깔아뭉개는 순간에, 그 사건은 금새 잊혀졌다. 히틀러를 말하긴 하지만, 그 이면에 스탈린주의의 반계몽주의와 그에 비굴하게 복종했던 수많은 대륙들을 말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공산주의식 리얼리즘처럼 예술의 나약함 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가?

 

 피카소는 끝났다. 그리고 갑자기 다시 부활하였다. 1968년,레리 Leiris 갤러리 에서 열린 la Fornarina 를 기억한다. 사람들이 경찰권력의 몰락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어떻게보면, 마오이즘적 전시가 아니겠는가?

 피카소는 당시의 여론을 거세게 일으켰다. 자클린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불평하곤 했다. 당신이 뭘 알기에? 그녀는 스페인어로 말했고, 이 점은 아주 중요하다. 나는 피카소가 스페인어로는 구두점을 찍지 않고 글을 썼다는 점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자클린은 그의 사망이후 자살하였다. 피카소는 두 명을 자살하게 하였다. 바로 자클린 Jacqueline 과 마리-테레즈 발터 Marie-Thérèse Walter 였다. 피카소는 훌륭하면서 동시에 혼동 그 자체였다. 바로 프랑스적 정신성의 양면이다 :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 도 그러했다. 그의 사진을 보라. 이 매력적인 남성은 모델들을 자신의 아틀리에로 데려오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들은 그에게로 향했다 : 쉬종 Suzon , 그의 그림 속 그녀가 있다. 폴리 베르제르바 Un bar dans les Folies-Bergére, 광기의 프랑스인 les Folies françaises 에서 이미 나타난 부분이었다.  와토 Watteau 의  질Gilles  에 아주 강한 추억이 나타난다 : 모두가 죽어갈 때, 쉬종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알아보자. 빅토린 Victorine 이 생각하는 것을, 그리고 마네가 베르트 Berthe 를 그릴 때 그녀가 생각하는 것을. 그녀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신체를 생각했다. 마담 세잔은 그의 남편이 임종에 처했을 때, 모자세공인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그가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마담 세잔은 무엇을 생각했던 것일까? 아무 것도. 마네는 성적으로 아주 해박하였고, 시간, 신체, 그리고 인생을 누렸다.

 횡설수설함도, 난잡함도 있었다. 그리고 스캔들도. 진정한 인생의 소설이 거기에 있었다. 바로 그의 그림을 모욕하며 찢으려는 사람들 앞에서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 그림은 현재의 오르세이 미술관에 열린 최근 전시에서도 사랑을 받고 있다. 내가 갔을 때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미술관의 무심함은 너무도 심했다. 마네, 피카소는 그들이 볼 수 있는 신체를 보았다. 무엇을 본 것인가? 신체가 그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도록 나타낸 화가들이었다. 그들의 그림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당신은 그림이 하는 이야기들도 이해하고 쫒아갈 수 있다. 그러면 이지도르 뒤카스 Isidore Ducasse[각주:3] 가 말하듯, 육욕을 즐기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다시 랭보 Rimbaud , 마네 Manet 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들은 완전히 현대적이었다. 사람들은 80세에 이르기까지 살지 않아도 되었고, 쥐고기를 먹는 시대였다. 그리고 영토를 떠나 아프리카로 가서 두 다리가 절단이 되는 시대였다. 랭보와 마네의 다리는 각각 프랑스의 비극의 시기동안 잘려나갔다.

 

 

사회적 비판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 반 고흐 Van Gogh 는 어떤가? 앙토닌 아르토 Antonin Artaud 를 말할거라면 이렇게 말하는 게 당연하다. 두권 분량의 날마다 써내려간 그의 마지막 텍스트는 어떤 비극이 프랑스에 닥쳤는지, 그것이 언어에, 그리고 언어를 사용하는 신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정신과 육체 모두 불안한 지금의 국가주의와 민중주의의 시대에 말이다. 앙토닌 아르토 Antonin Artaud 는 반 고흐 Van Gogh 에 대해 심오한 글을 썼다. 하지만, 당신은 마네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을 볼 것이다. 그리고 초현실주의자도 관심 밖이다. 1969년에, 아라공 Aragon 은 마티스 Matisse 에 관한, 그리고 피카소 Picasso 를 폄하하는 글을 남겼다. 마티스는 훌륭한 작가지만, 마네 Manet 와 피카소 Picasso 의 것과 같은 시선으로 여성을 보진 않았다. 마티스의 여성은 매우 아름다운 모자를 썼지만, 장식적이며,어떤 강렬한 것을 이야기하진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황폐의 시기에 예술이란 무엇인가? 드보느 Debord 가 상상할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점점 스펙타클하게 진행될 것이다. 그렇기에 내 글이 소설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비평인 이유이다. 여성과 남성, 이 두 존재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 상징하는 것은 존재가능한 요소들보다 훨씬 반사회적이며 은밀한 것이다. 사회는 그것을 모두 알지 못하며, 진정한 혁명의 유형을 중단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작품으로 표출시킨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선, 불쾌한 면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마네 Manet 와 피카소 Picasso 를 말소하는 이유가 있다. 그러면, 모두가 바라는 세상이 올것인가? 전쟁이나 사회운동, 혹은 자유의 쟁취에 행복이 있는가! 우리는 현재 추락하는 사회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누가 마네 Manet 를 기대하겠는가? 그리고 피카소 Picasso 는? 그리고 누가 내 원고를 구입하여 상하이 대학ㅇ 익명으로 제공할 고리타분한 수집가가 될 것인가? 어쨌든, 나는 아니다.  

 

 

출처 : ARTPRESS #386. 2012.02

기사 : Jacques Henric

번역 : PLONGEUSE (zamsoobu) 2012.05

  1. 트리올레 [Elsa Triolet, 1896~1970] 요약 프랑스 시인 L.아라공의 부인인 프랑스 소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 점령 하에 남편과 함께 〈심야총서〉 기타의 비밀 출판에 협력, 로랭 다니엘의 필명으로 저항문학의 걸작 《아비뇽의 애인들》을 비밀 출판하였다.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러시아 모스크바 주요수상 공쿠르상 주요저서 《아비뇽의 애인들 Les Amants d'Avignon》(1943) 본문 모스크바 출생. 시인 V.마야콥스키의 처제(妻弟). 처음에는 러시아어로 저작하였으며, 1928년 타히티섬을 여행하고 돌아와 프랑스 시인 L.아라공과 결혼하였다. 《잘 자요, 테레즈 Bonsoir, The re se》(1938) 《흰말 Le Cheval blanc》(1943) 《Le Premier accroc cou te deux cents francs》(1945, 공쿠르상 수상) 등을 발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 점령하에 남편과 함께 〈심야총서〉 기타의 비밀출판에 협력, 1943년에는 로랭 다니엘의 필명으로 저항문학의 걸작 《아비뇽의 애인들 Les Amants d'Avignon》을 비밀출판하였다. 아라공의 시·소설에 나오는 이상의 여성으로도 유명하다. [출처] 트리올레 [Elsa Triolet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2. 카를 라데크 [Karl Bernhardovich Radek, 1885~?] 요약 폴란드계 유대인 출신의 러시아 정치가·공산주의 이론가. 독일사회민주당에 들어가 동맹파업전술을 주장하였고 러시아혁명 후에는 볼셰비키에 입당하였다. 코민테른 및 러시아공산당 간부를 지냈고 독일에 잠입하여 독일공산당을 지도하였다. 본명 소벨손(Sobelsohn) 국적 러시아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독일혁명》(1918), 《코민테른의 5년간》(1924) 본문 본명 소벨손(Sobelsohn). 1904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사회민주당원이 되어 로자 룩셈부르크의 인정을 받았다. 1908∼1913년 독일사회민주당에 들어가 당내 극좌익으로 동맹파업전술을 주장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스위스에서 활약하였고, 러시아혁명 후에는 볼셰비키에 입당하였다. 독일혁명 후 독일에 잠입하여 독일공산당 창립에 힘쓰다가 체포되어 1919년 2~12월 독일 감옥에서 복역하였는데, 그때 독일 군부와 적군(赤軍)과의 유명한 비밀상호원조협정의 기반을 닦았다. 석방된 후 코민테른 및 러시아공산당 간부가 되었는데, 또다시 독일에 잠입하여 독일공산당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1923년 여름의 혁명적 정세하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획득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실각하였다. 그 후에도 국제문제에 관하여 가장 유능한 평론가로서 러시아에서 활약하였으나, 1927년 트로츠키파(派)로서 러시아공산당으로부터 제명되었다. 1930년 당에 복귀하였으며, 1931년 정부기관지 《이즈베스티야 Izvestiya》의 주필이 되었는데, 1937년 1월 다시 트로츠키파로서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41년 다시 석방되었으며, 1940년대에 사망하였다고 전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저서로 《독일혁명》(3권, 1918) 《코민테른의 5년간》(2권, 1924) 등이 있다 [출처] 카를 라데크 [Karl Bernhardovich Radek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3. Isidore Lucien Ducasse, né à Montevideo (Uruguay), le 4 avril 1846, et mort dans le 9e arrondissement de Paris, le 24 novembre 1870, est un poète français. Il est également connu sous le pseudonyme de comte de Lautréamont, qu’il emprunta très probablement au Latréaumont d’Eugène Sue1 et qu'il n'utilisa pourtant qu'une seule fois. Il est l'auteur des Chants de Maldoror, de deux fascicules, Poésies I et Poésies II, ainsi que d'une correspondance habituellement publiée sous le titre de Lettres, en appendice des œuvres précédentes1. Son œuvre compte parmi les plus fascinantes du XIXe siècle, d'autant plus que l'on sait très peu de choses sur leur auteur, mort très jeune à vingt-quatre ans.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