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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1.18 인터뷰_파울로 브랑코 Paulo Branco-(1)

인터뷰_파울로 브랑코 Paulo Branco-(1)

리스본의 미스테리 Mystère de Lisbonne 이후에, 제 2이의 크로넨버그[각주:1]로 불리는 파울로 브랑코는 프랑스 영화의 제작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담하게!

파울로 브랑코를 보며, 잿 속에서 부활한 불사조만큼 더 그를 잘 묘사하는 말이 없다. Mystères de Lisbonne (이번 달에 DVD 출시) 의 뜻밖의 선전과 돈 드릴로Don Delillo 의 Cosmopolis 를 각색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차기작이 5월 말에 크랭크인 되는 가운데, 파울로 브랑코는 그의 떠들썩한 시작을 알렸다. 2008년 말 법정 분쟁을 해결하고, 그의 제작사인  제미니 영화사Gemini films 는 가장 빼어난 영화를 제작했다. 많은 동료들(Raoul Ruiz라울 루이즈[각주:2], Manole de Oliveira 마뇰 드 올리베이라[각주:3] , Jean-Claude Biette 장-클로드 비에트 , Joao Bothelho 후앙 보텔로, Alain Tanner 알랭 타네[각주:4], Werner Schroeter 베르너 슈뢰터[각주:5] ), 협력자들( Joao César Monteiro 후앙 세자르 몽테이로 , Danière Dubroux 다니엘 듀브로 , Sharunas Bartas 샤루나스 바타스[각주:6], Pedro Costa 페드로 코스타[각주:7], Christophe Honoré 크리스토프 오노레[각주:8] ),그리고  측근들( Jean-Claude Guiguet[각주:9] , Robert Kramer 로버트 크라메르[각주:10], Olivier Assayas 올리비에 아싸야스[각주:11] , Peter Handke 페터 한트케[각주:12] , Jacques Rozier 자크 로지에[각주:13] , Philippe Garrel 필립 가렐[각주:14] , Chantal Akerman 샹탈 아크만 [각주:15] , jerzy Skolimowski 제르지 스콜로모우스키) 등이 많든 적든, 파울로 브랑코 로부터 진정한 작가의 자유라는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독특하고 특별한 과정을 좇기보다, 이 지면에서 우리는 현 프랑스 영화계에서 재정과 기술적 변천이 제작에 있어 어떤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지 살펴볼 것이다. 시네필로서 파울로 브랑코를 이 지면으로 초대하여 솔직한 답변을 듣고자 한다. 소피카Sofica, Ifcic 의 메카니즘과 개인방송국과 공공채널의 역활에 대해, Hadopi 법칙의 변화와 유럽 제작사들의 해체, 그리고 그의 위상을 보고자한다. 확실하진 않지만, 프랑스 영화 체계를 발전시키고자하는 바람도 있다. 그러기 위해 이런 기복과 요구보다 안락과 표준화가 더 불리해보인다. 그는 함정을 설치해놓고, 용맹과 열정을 유지한다. 그리고 늘 산업으로 제한될 수 있는 예술적 창조물의 위험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 70년대 감독님과 카이에 뒤 시네마의 관계가 시작됬죠. 공화국 시대예요.
 어떻게 보면, 난 카이에와 함께 전문적 경력을 쌓기 시작한 거죠. 당시에, 포스투칼을 떠나서 프랑스로 불법적 이민자가 되었습니다. 난 카이에 측에 한 주간의 프로그램을 제안했어요. 처음은 유슐린 Ursulines 스튜디오 에서 였죠. 그때 세르지 다네 Serge Daney [각주:16]와 친구가 됬는데, 상영관 설립 계획을 구상했어요. 난 합법적 이민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제르지가 앞장서서 추진햇습니다. 사실 그는 대리 명의인이 아니었어요. 우린 장-클로드 비에트Jean-Claude Biette 와 자주 만나서 식사를 하면서 프로그램을 계획했어요. 몇해에 걸쳐, 여기에 매달렸죠.
 그 다음에, 세르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제작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제작자로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저버리지 않았어요. 부분적으로는 《포르투칼 의 중심》(Cahiers N# 322. 1981.4) 이란 칼럼을 따른 거죠. 난 내 길을 가야했어요. 그가 아직 카이에에 있을 때는 타락한 사랑 L'amour de perdition(1979) 를 옹호했고, 리베라시옹Libération 에 있을 때는 프란시스카Francisca (1981) 를 지지하면서 내가 올리베이라 Oliveira 에서 영화를 계속 만들도록 힘이 됬습니다. 그때, 일반 미디어들, 몇몇 비평가들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수가 몇인지 몰랐기때문에, 영화는 논평에 의해서 판단되었죠. 프란시스카 에서 800명의 관객이 들었어도 올리베이라 가 다음 영화를 찍을 수 있었죠.

그렇게 적은 관객이었나요? 
 네, 라울 루이즈 Raoul Ruiz 의 훔친 그림의 가설L'Hypothèse du tableau volé 도 500여명 안팍이었죠. 하지만 훌륭한 영화였어요. 사람들은 이런 영화들이 주요작품으로 뽑힌 다는 거에 아주 놀라워했지만요.

● 처음부터, 진행을 맡아하길 원하셨던가요?
 상영관 설립 당시에 난, 배급자였습니다. 아주 활발하게 사람들과 교류했어요.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를 위한 비공식 상영을 계획했죠. 한번은 다니엘 쉬미드 Daniel Schmid 의 천사의 그늘 L'ombre de anges 를  《영화 속의 유대인》이란 타이틀로 상영했었죠. 그게 논란거리가 욌어요. 영화는 유대인배척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았죠. 상영관에는 들뢰즈 Deleuze, 푸코 Foucault, 파스빈더 Fassbinder , 잉그리드 카벤 Ingrid Caven 등이 있었어요. 다니엘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세르지는 계속 웃더군요. 이후에 이런 즐거운 일들을 벌였어요. 상당수의 감독들, 다니엘 뒤브루 Daniel Dubroux 나 로렌스 페레이라 바보사 Laurrence Ferreira Barbosa 가 한 때 내 일을 도왔죠.

 ● 라울 루이즈의 작품이나 올리베이라를 제작하기 위한 예산을 어떻게 마련했나요?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만들어낸겁니다! 그래도 포르투칼 영화 협회가 있어서 사전 협력을 승인받았죠. 몽테이로의 Silvestre(1982)Moi, l'autre de Botelho(1982) 를 시작하게 된 거죠. 이게 모두 타락한 사랑 L'amour de perditio 프란시스카Francisca 에서 받은 평단의 호평덕분이었죠.

● 한 번의 호평이 그런 예산에 충분한 도움이 되었나요?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게 당시엔 있었어요 : 흥행의 상여금이죠. 평단이 그걸 제공했구요. 그래서 우린 위험하고 아주 불확실한 방법으로 자금을 마련했어요. 그 때, 프랑스 영화 시스템을 완전히 무시하고 영화를 제작했어요. 루이즈의 해적들의 도시 La Ville des pirates(1983) 가 베니스 영화제에 선정됬죠. 크리스티앙 부르구아 Christian Bourgois[前 제작 지원금 조정위원회장. ]가 내게 영화를 만든 후에 보여달라고 했죠. 영화를 만들 긴 했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어요 : 허가가 나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10여편의 영화가 완성 이후에 허가를 받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모든 게 조금은 거칠 게 진행된 겁니다.

●현재와 비교하면 당시는 어땠나요?
 문제는, 독립 영화제작사입니다. 발전하기보다 점차 설자리가 좁아지고 있죠. 카날 플뤼Canal + 가 생기기 전에, 적은 예산의 열악한 상황에서 영화를 만들었죠. 카날 플뤼 Canal+ [각주:17]가 생기고 난 이후에, 다양하게 예산을 충당할 방법이 생겼죠. 또 영화 전문 기금 Sofica[des sociétés de capitaux exclusivement dévolus au financement du cinéma, 1985년 창설.]이후에도 그렇죠. 하지만 동시에, 결정권도 많이 변했죠. 더 이상 제작자가 아닌, 기금을 지원하는 자가 결정을 합니다. 제작자가  《합시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따라갔죠. 카날 플뤼가 많은 부분 지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으면, 항상 다른 순간, 다른 이들에게 보여질 영화를 만들 가능성이 있어요. 필립 가렐 Philippe Garrel 의 Le Coeur fantôme 에서 르네 보넬은 거절했지만, 러쉬필름을 보여줬고고 다 잘됬어요. 어떤 순간에도 지원금을 받아낼 수 있었죠. 영화가 끝나면 선금이 훨씬 중요합니다. 로지에는 Maine Océan (1986) 때, 텔레비전 방송국의 한 채널과 계약했죠. 겨우 곤경에서 벗어나 손실을 채울 수 있었지만, 우리 발에 걸려 다시 넘어질 수도 있었죠.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한 영화가 전적인 부담을 안고 가지 않도록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을 업계종사자들이 만들었습니다. 더이상의 위험부담은 없죠. 이전에 우리가 위험에 처했다면, 지금은 위험을 피하고 있죠.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걸 하며 위험을 안고가기도 합니다. 결정권은 제작자들에게 갔지만요. 이건  예전에 티비방송국의 사전제작 시스템으로 일했던 방식과 완전히 단절된 거예요. 역설적이죠. 르네 보넬 때는 자유가 있었거든요. 그녀가 왕처럼 군림했지만요. 카날 플뤼는 프랑스 영화의 90퍼센트를 이끌었어요. 지금은 훨씬 어렵죠. 카날 플뤼와는 좋은 기억만 있어요. 그들이 없었다면 이루지못할 프로젝트가 많죠. 하지만 채널도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율적 권한을 잃었어요. 카날 플뤼의 도움없이 영화를 만들죠. 아니면 다른 쪽과 손을 잡거나요. 난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제 3의 출구》를 찾았죠 : 방송국 채널, 사전지원금, 지역기금 등. 항상 표준채널의 도움을 얻는데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20여년간 공공 채널의 도움없이 만들었죠.

● 당시에 감독님이 만든 영화는 대형예산이 아니지 않았나요?
 어떤 영화도 자본이 많이 들지 않았어요. 프랑스영화의 평균 제작비에 훨씬 못미치는 가격이죠. 지금도 난 그래요. 영화의 비용을 절감할 방법을 알기 대문에 자유로움이 있죠. 잘 알려진 감독 중에, 안드레 테신 André Téchine 이나 크리스토프 오노레 Christophe Honoré 같은 감독도 독립영화 제작자(스튜디오에 의존하지 않는)입니다. 그들은 6백이나 7백만 유로를 예산으로 제시하죠. 
 
● 라울 루이즈나 다니엘 듀브로 와 함께 감독님이 80년대 했던 것들을 하고 싶어하는용기있는 제작자가 없나요?
 그들이 할 지 안할 지 나로선 모르죠. 그건 내 결정을 벗어난 겁니다. 가이엘 모렐Gaël Morel 의 다음 영화(너와 함께 숨는다 S'enfuir avec toi, 베아트리스 달Béatrice Dalle 주연. )과 델핀 크루터 Dephine Kreuter (Dubai falmingos, Vacande Parsdis) 에 난 한푼도 투자하지 않았어요. 델핀은 이전에 카날측에 사전지원을 받았음에도 거절당했죠. 아주 고전적인 시나리오였어요. 델핀 크루터는 모렐의 영화만큼이나 처음엔 아주 모호합니다. 이해할 수 없죠. 지난 15년간 그래왔어요. 존재하지 않는 제작자에 대한 일종의 믿음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 끝났어요. 모두가 항상 제로에서 시작해야합니다. 하지만 불만은 없어요. 그런 점이 동기를 부여하거든요.

리베라시옹libération(2009. 4.7) 지에 Hadopu 법에 대해 반대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 전쟁의 새로운 기수로써 인터넷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프랑스에서, 어떤 시스템을 비판하면 보복이 따릅니다. 그게 아도피 법이죠. 거기엔 아무도 읽지 않은 역혀과가 있어요. 어떤 이나 어떤 방식으로는 그게 강압적일 수 있어요 : 수치를 제어하고, 공공 채널의 부분적 수요를 무시하는 것등...프랑스 중앙 영화청CNC(Centre national de cinématographie ) 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죠. 그들이 비록 우리에게 호의적이진 않았지만, 흠잡을만한게 없었거든요.
 사람들은 그 때의 내가 한 일을 이해하지 못해요. 억압적인 법에 대항하는 거였는데 말이죠. 우린 문제가 있단 걸 알고, 해결책도 찾아야한다는 걸 알지만, 그게 강압적인 방법으로는 아닙니다. 나는 조합의 내부에서 이런 끔찍한 법안을 받아들인 게 더 놀라워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비유적으로 말해 강압적인 법으로라도 이런 불법 다운로드를 막아야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이 인터뷰는 니콜라 사르코지의 최근 법안 개정 이전에 이루어졌음].

많은 사람들이 이 법안에 찬성하지 않았나요?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했어요. 우리 프랑스같은 자유 사회에서 공권력이 통제하는 시스템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그래서 이건 제작자로서가 아니라, 저항의 목소리, 한 시민의 저항의 목소리이죠.

 ●그럼 어떤 해결책이 좋을까요?
 새로운 수단이 필요합니다. 많이 다운로드 받는 영화는 흥행한 영화입니다. 인터넷에서 찾기가 쉽죠. 이미 다운로드 받은 것에 비하면 파편일 뿐이죠. 그러므로 균형을 이룰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통합 라이센스는 좋은 사례죠. 수익을 따져본 이후에 다시 재배급할 때의 경우에요. 이건 다운로드 빈도수를 안정화시키기보다 영화 투자와 재배급 측면에서 바라본 겁니다. 이게 유효할 수 잇습니다. 통합 라이센스는 영화의 첫 개봉당시 수익을 헤아린 후에 이뤄질 수 있겠죠. 그리고 배급망을 확보하기 위한 예산도 줄어들 겁니다. 분명히 사전 지원은 괜찮은 제도이지만, 한계가 있어요. 오늘날 영화를 1천5백만 유로 정도로 만드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죠. 최소한도로 간략하게 하더라도요 : 20여명의 제작팀원과 5주나 6주간의 촬영기간. 사전 지원금은 최대 40만에서 50만 유로입니다. 통합 라이센스가 기금을 다시 모을 수 있기 때문에,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난 이런 제도가 창의성의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INA [각주:18]는 연구를 지원했어요. 현재는 아니죠. 그들이 아니었다면 우린 소설이나 다큐멘터리밖에 가지지 못할 수 있었어요. 지금처럼 클로소프스키[각주:19]를 각색해서 루이즈의 도둑맞은 그림에 대한 가설 L'hyphthèse du tableau volé 를 만들 수 있었을까요? 이미 발표된 것에 대해선 다른 수단을 찾아야합니다. 미국인들이 우리보다 앞서는 이유죠. 매트릭스 처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문제죠!    

● 미국의 독립영화사는 개인투자자에 더 의존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개인 투자란 건 없어요. 수익에 대한 기대없이 하는 거니까요. 프랑스에서는 Sofica 체제는 수익에 대해 문제삼진 않아요. 공공 채널이 돈을 벌려할 뿐이죠! 다행히, 오랫동안 이런 정책이 국립영화센터 CNC 에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될까 두려워요.
 내 생각에 프랑스는 과거의 경험치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같아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지난 시절에 비해 더 퇴보한 부분도 있죠. 수많은 영화 중에서, 기존의 것보다 뛰어난 것, 창조력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을 만들어야합니다. 사람들은 시스템을 유지하고 싶어하지만, 표준화된 제작사로만 머무를 수 없어요. 다른 나라에서는, 프랑스가 다양함을 유지하려 한다고 알려져있죠. 하지만 더 밀어붙어야 합니다. 지난 20여년간 그래왔던 것과는 다른 영화를 위해서요.

여기에서, 프로듀서의 입장을 빠뜨린게 아닐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결정권은 작가들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예술적 창조란 면보다 영화산업 족에 가깝죠. 우린 산업을 창조물만큼이나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그 때문에 문제가 더 커지더라도 말이죠. 이전에, 우린 파테Pathé 나 고몽Gaumont 이란 영화 스튜디오 안에서 대단한 일들을 이뤄냈습니다. 라쌈[각주:20] 이나 투스칸 드 플랑티에[각주:21] 와 함께요. 미국 스튜디오는 그래도 프랑스 스튜디오에 비해 자유로운 상황이었죠. 독립 영화계에서, 의사 결정권이 다수에게 있었어요. 만약 그 의견을 다 들었다면 크리스토프 오노레의 Mystère de Lisbonne 이나 Ma mère 는 세상에 없었을 겁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왜 그것을 하는 지에 대한 것뿐 아니라, 그것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어요. 창작에 있어, 실패할 권리도 있는 겁니다. 이미 알려진 걸작은 재미가 없어요. 내가 재미있어 하는 것은 존재하진 않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원석을 다듬는 일입니다. 몬테 헬만 Monte Hellman[각주:22], 데이비드 핀쳐 David Fincher, Shyamalan 이 성공하고 다른 이는 실패했죠. 더이상 프랑스 영화에선 실패가 보이지 않아요. 기존의 것을 고집하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단계, 배우 캐스팅에서도 그렇구요. 테시네의 야생 갈대 Les Roseaux Sauvages 에서는 흥행배우 없이도, 큰 성공을 거두었죠.  

● 시나리오 문제로 다시 돌아올까요?
 물론입니다. 제작자측은 시나리오를 따르죠. 이후에,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프랑스 체계는 아주 복잡해요. 국립영화센터CNC 초기에는 이랬죠 : 좋아, 당신들 돈이 있으니까 적든 많든 잃지 않고 벌길 바래. 그때는 세금을 덜 지불했기 때문에 이윤이 늘 남았습니다[국립영화센터 CNC 에 등록하면 조세혜택을 받았음.ndlr]. 하지만 지금은 투자액을 모두 회수하는 것 뿐 아니라 더 많은 수입을 원하죠. 국립영화센터는 이제 위험부담을 지고 가는, 제작사의 제어기구로 전락했어요.
 Ifcic[Institut pour le financement du cinéma et des Industries culturelles.ndlr  ]도 마찬가지예요. 1983년에, 영화 투자자와 후원자들을 위해 부동산과 신용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죠. 그 중에서도 코피시네 Coficiné 와 코필루아지Cofiloisir 에서는 어떤 손실에서도 50-70%의 보상을 지원했어요 : 영화 제작이 중단되거나 예산을 초과하거나 하는 경우, 예를 들어 퐁네프의 연인들 에서 카락스 의 사례가 그랬죠. Ifcic에서는 재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보상을 했어요. 현재 Ifcic의 보상액 수준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지금에서, 어음을 할인받지 않고서 영화를 직을 순 없을 겁니다. 영화를 외상으로 찍고 있어요 : 카날 플뤼는 방영 된 이후에 지불하죠. 그래서 촬영기간 동안 우리가 유일하게 믿을 구석은, 사전 제작지원 입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촬영 첫 날 받을 수 없어요. 우리야 재정 단체로부터 협력을 약속받고 싶지만, 단체로서는 Ifcic가 허가를 하면 돈을 내준다고 말하죠.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110이나 120% 로 준비가 되면 그때서야 허락을 할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대해 좀 지쳤어요. 우리가 조금이라도 위험해보이면 Ifcic 은 거절하죠. 그리고 Ifcic가 거절하면 제작이 더 힘들어져요. 그렇게 때문에 사전 지원을 약속받은 많은 영화들이 결국 완성되지 못하는 겁니다. 너무 지나친 방어때문이죠.

● 제로에서 시작하는 거군요.
 정확해요. 산업이라는 점에 집중하면 이게 영화라는 것을 완전히 잊고 말죠. 말로Malraux 는 이런 말을 했죠 : 영화는 예술이다 ; 또한, 산업이다. 그리고 지금 우린 이렇게 말하죠 : 영화는 산업이다...그러나 뜻밖에도 에술이다.
 하지만 나는 비관주의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요. 비관주의가 되지않고도 충분히 돋보일 수 있죠. 프랑스에서는 연간 250편의 영화를 만들어요. 처음 영화를 만들 기에, 많은 기회가 있는 땅이죠- 두번째는 힘들 더라도. 그래서 우린 시스템으로 일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Mystere de Lisbonne 은 탄생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델핀 크루터의 영화도 그렇죠. 가이엘 모렐도 그래요. 재정적 지원 차원에서, 유럽에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을 겁니다.

●정말 역설적이군요.
 사실, 우린 매주 놀랍니다. 그리고 20-30년 전이 그립다고 말하지 않아요. 정말로. 그런 점을 생각해봐야해요. 무언가 바꿔야 할 게 있는거죠. 우린 신용체계가 《제도화》되었다고 합니다. 왜 까날 플뤼는 촬영비를 분담하지 않습니까? 왜 아르트 Arte [각주:23]는 나르시스즘에 빠지기만 하고 반성을 하지 않나요? 우린 제작자들에게 아첨하는 아르트측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우린 제도가 감싸고 도는 제작자들을 싫어합니다. 그런 사람들과는 거의 작업하지 않아요. 게다가, 그런 이들은 제작자들의 권리를 악용합니다. 한 방송국의 지원을 받으려면, 그들에게 엄청나게 뭔가를 줘야합니다. 카날 플뤼 사람들은 제작자들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안g죠.  사람들은 프로덕션에 속할 지 아닐지에 대한 선택을 비판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게《당신이 해야 하는지 아닐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 아르트가 제 역을 못하고 있다고 보시나요?
 아뇨! 사람들은 아르트 영화 10편이나 15편이 칸느에 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수의 영화가 불발되는지도 봐야해요. 그들은 그러한 결정권한을 가지고 있어요. 사람들은 그점을 잊죠. 젊고 유망한 제작자라도 방송국이 도와주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위원회에 누가 있는지 잊어서는 안되죠. 재고해야할 관계입니다.  

● 포르투칼에서도 제작하셨는데요. 포르투칼 시스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포르투칼에서는, 영화의 거의 전 비용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있어요. 70만 유로 상당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죠. 많은 영화, 예를 들면 미구엘 고메 Miguel Gomes 은 제도의 지원을 받았죠. 하지만 일년에 10편의 영화로 제한되어 있어요. 현재는 독립영화의 해외 판로가 막히면서 아주 폐쇄적이 되었어요. 프랑스에서 흥행한 영화라도 해외 에선 안통할 수 있습니다. 적은 예산의 영화가 해외에서 호평을 받는 경우는 아주 드물어요. 그리고 아주 특별한 경우이죠 : 크리스토프 오노레의 La Chansons d'amour 하고 Mystère de Lisbonne 으로 해외에 판매를 했습니다.

●그럼 어떤 점이 꼭 필요할까요?
 배급사가 영화를 방송국에 팔 수 있게 되면서 판권을 산지는 15년에서 20년 남짓해요. 지금은 아닙니다. 배급사는 겁먹었어요. 르네의 영화가 아직 해외에서 팔리고 있지만, 아주 소량이죠.
 리스본의 미스테리 Mystère de Lisbonne 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건 제작이란 면에서 미확인물체였죠. 내가 영화를 찍기 시작할 때, 모두가 미쳤다고 했죠. 완성하지 못할 거라고 했죠. 하지만 난 시나리오가 아주 멋지다고 자신했었죠. 두 가지 다른 그림 위에서 움직였어요 : 《시리즈》란 그림과 《영화》라는 그림이었죠. 그래서 두 나라에서 진행했죠 : 시리즈는 프랑스에서, 영화는 포르투칼에서였죠. 모든게 무산되는 걸 막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돈이 필요했습니다. 난 영화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기다리지 않았어요. 그건 기적이죠. 그리고 일생에 단 한번 찾아옵니다 : 포르투칼에서 4시간 30분짜리 영화가 프랑스에서 10만 관객을 모으다뇨! 난 영화를 카날 플뤼에 팔았어요. 하지만 돈이 되진 않았죠. 폭넓게 접근하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유럽 영화는 프랑스 영화의 경우처럼 단순하지 않아요. 그들이 유럽 영화를 사고싶다면 그렇게 하지만, 프랑스 영화가 일정부분 할당되도록 해야되거든요. 왜냐하면 외국 영화를 수입하는 것에 불이익을 주자는 거지요.
 루이즈의 영화는 전세계적으로 팔리고, 미국에서 5만 달러에 팔려서 50개 도시에서 상영이 되었죠. 프랑스나 포르투칼에서는 비디오로도 출시가 안되었어요. 나는 해외상인이고, 배급자이지만, 내 안에는 장인정신도 있어요. 그래서 자유롭죠. 난 포르투칼 위원회에 4번이나 찾아갔어요. 자유롭고 거침없이 이렇게 말했죠 : 《아뇨, 끝까지 가볼 겁니다.》 칸이나 베니스 같은 경합에 내비칠 필요없이 기회를 얻었죠.
 리스본의 미스테리 Mystère de Lisbonne 는 일주일 동안 홍보했죠. 영화가 첫 주 모든 회차에 개봉되었고(실제로 하루에 2회만 상영됨), 난 월요일에 시작되었어요. UGC Ciné Cité les Halles 에서 개봉될 기회를 얻었죠. 화요일에는 관객이 별로 없었죠. 목요일은 평균이었어요. 다행히, 기사가 난 이후에 금요일에는 사람이 많았죠. 그리고 토요일 첫 회에, 극장이 미어터지더군요. 성공이었죠. 다행이지만, 그 주에 비가왔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누가 이 영화를 보러 오겠어요? 존재감이 없었겠죠.
 그런데 여기에 다른 배급 방식이 있다면, 안될 게 뭐가 있어요? VOD는 사람들이 보려할까요? 이미 알려진 영화는 그렇겠지만, 다른 건 아닐 겁니다. 난 인터넷에 VOD로 리스본의 미스테리 Mystère de Lisbonne 무료상영을 찬성해요. 다음 영화에서 사람들은 나,혹은 루이즈를 알아보겠죠. 현상황에서는 다른 표현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다른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예를 들어 쿠엔틴 드피유 Quentin Dupieux 의 Rubber 는 다른 공간을 찾은 경우죠.
 사람들이 돈을 내야한다면, 그들은 안갈 겁니다. 하지만 무료라면, 갈 수도 있죠. 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매체를 파괴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매체라는 건 프로듀서들한테도 꼭 필요한 것이니까요. 어느 한 시기에는, 변해야 할 겁니다. 왜 카날 플뤼 채널에 방영하는 것과 개봉시기 사이에 6개월에서 1년이란 차이가 있어야하나요? 비디오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겁니다.
      
염려되는 것은 DVD시장의 과열아닌가요?
 그러면 왜 카날 플뤼는 흥행작의 DVD출시를 왜 6개월이나 미루는 건가요? 왜 모두가 한결같이 그런가요? 예를 들어 관객수가 10만 보다 미만인 영화는 불법적 거래가 이뤄질 수 있어요. 흥행작이 아닌 영화의 DVD출시는 불보듯 뻔합니다 ; DVD로 출시되는 경우는 드물죠.

● 리스본의 미스테리 Mystère de Lisbonne 어떻게 지방에서 개봉되었나요? 
 영화는 지방의 200여 상영관에서 개봉되었어요. DCP(Digital cinema package, copie numérique.ndlr )가 없는 곳도 부지기수였죠. 그래서 블루-레이로 다 틀었죠. 사람들은 첨에 아무도 안믿었죠. 이 방식은 코폴라Copola[각주:24] 가 제안한 겁니다. Estoril 에스토릴 축제에서요. 코폴라 감독은 테트로Tetro의 [각주:25] 로 틀었어요. 그게 원래의 포맷에 비교해서 같거나 더 나은 화질을 보여줄거라 했죠. 진짜그랬어요. 크로넨버그도 똑같이 말했어요. 분명히, 블루 레이는 미국의 입장에선 불편하지만 암호화가 되어있어요. DCP는 다수의 상영관에 영사가 가능하죠.
 블루-레이는 누군가 대신 준비할 있어요. 하지만 난 기꺼이 했습니다. 영사기사가 내게 말했죠 :《어떻게 하란 겁니까, 소형 프로젝터 밖에 없잖습니까? 》그래서 난 대답했죠 : 《어려울 거 없어요, 플레이스테이션을 사서 연결한 다음에 잘 영사하면 됩니다. 》팀 내부에서도 반대의견이 있었어요. 그들은 영화가 불법유통 될 것을 두려워했어요. 그래서? 문제가 뭡니까? 적어도, 영화는 보게 되는 데. 
 해외로 판매하는 프랑스 독립영화 제작사는 DCP를 자체적으로 만듭니다. 예를 들어, 내가 포르투칼에 배급하기 위해 프랑스 영화를 사면, 그들이 DCP를 만들어서 제공을 합니다. 해외에서 프랑스 영화를 개봉하는 것 자체가 이미 기적입니다. 왜 배급에까지 욕심을 내려합니까? 10배나 더 비용이 드는 데! 이런 강박관념은 상상 이상입니다, 전혀 쓸 데 없는 거죠. 인터넷에서 예를 들면 ; 프랑스는 전적으로 차단을 한다곤 하지만, 이미 젊은 세대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서 불법다운로드를 하고야 말죠. 그러면 이런 법안으로 얼마나 많은 걸 잃어야 합니까? 내가 비판하는 건 전문가들이 보수적 태도로, 시대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영화가 보여질 수 없다면, 왜 만들어야 하나요?

 (2)에 계속....




출처 : 103- 쪽, Cahiers du Cinéma
기사 :
번역 : PLONGEUR ( zamsoobu )
  1.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David Cronenberg, 1943. 3. 15.~] 요약 캐나다의 영화감독. 《열외인간》, 《스캐너스》, 《플라이》등의 작품을 만들면서 공포영화 장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신체 해부 등의 혐오스러운 장면들 아래 인간다움의 가치를 규정한 서구의 통념에 대해 비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외《데드 링거》,《크래시》등의 작품을 만들었다.[출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David Cronenberg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2. Raúl Ernesto Ruiz Pino (25 July 1941 – 19 August 2011) was a Chilean filmmaker [본문으로]
  3. Manoel Cândido Pinto de Oliveira, GCSE (Portuguese pronunciation: [mɐnuˈɛɫ doliˈvɐjɾɐ]; born December 11, 1908) is a Portuguese film director born in Cedofeita [본문으로]
  4. Alain Tanner (born 6 December 1929, Geneva) is a Swiss film directo Tanner studied economics at the University of Geneva. In 1951, he joined the film club which Claude Goretta had recently established at the university. After his graduation and a short time working for international shipping companies, he felt drawn to film. [본문으로]
  5. Werner Schroeter (7 April 1945 – 12 April 2010) was a German film director and screenwriter,[1][2] who some consider among the most important German writer-directors of the post-war period. [본문으로]
  6. Šarūnas Bartas (born 16 August 1964 in Šiauliai) is a Lithuanian film director. One of the most prominent Lithuanian film directors internationally from the late 20th century. [본문으로]
  7. Pedro Costa (born 1959) is a Portuguese film director. He is acclaimed for using his ascetic style to depict the marginalised people in desperate living situations. Many of his films are set in a district of Lisbon inhabited by the socially disadvantaged and shot in a natural and low-key way that makes them resemble documentaries [본문으로]
  8. Christophe Honoré is a French writer and film director born in Carhaix, Finistère in 1970. After moving to Paris in 1995, he wrote articles in "Les Cahiers du Cinéma." He started writing soon-after. His 1996 book Tout contre Léo (Close to Leo) talks about HIV and is aimed at young adults; he made it into a movie in 2002. He wrote other books for young adults throughout the late 1990s. His first play, Les Débutantes, was performed at Avignon's Off Festival in 1998. In 2005, he returns to Avignon to present his latest creation, Dionysos impuissant, in the "In" Festival; Joana Preiss and Louis Garrel, who has acted in a number of Honoré films, played the leads. A well-known director, he is considered an "auteur" in French Cinema. His 2006 film "Dans Paris" has led him to be considered by French critics as the heir to the Nouvelle Vague Cinema. In 2007, Les Chansons d'amour was one of the films selected to be in competition at the 2007 Cannes Film Festival.[1] Some of his movies or screenplays (like Les filles ne savent pas nager, Dix-sept fois Cécile Cassard and Les Chansons d'amour) deal with gay or lesbian relations. Honoré has been the screenwriter for some of Gaël Morel's films. He has also directed Romain Duris in five different films. [본문으로]
  9. Jean-Claude Guiguet (22 November 1948, La Tour-du-Pin, Isère – 18 September 2005) was a French film director and screenwriter. He directed eight films between 1978 and 2005. His film Les passagers was screened in the Un Certain Regard section at the 1999 Cannes Film Festival.[1] [본문으로]
  10. Robert Kramer (22 June 1939 – 10 November 1999) was an American film director, screenwriter and actor. He directed 19 films between 1965 and 1999. His film À toute allure was entered into the 1982 Cannes Film Festival.[1] [본문으로]
  11. Olivier Assayas (born January 25, 1955) is a French film director and screenwriter. He made his debut in 1986, after directing some short films and writing for the influential film magazine Cahiers du cinéma. [edit] Career Assayas's father was French director/screenwriter Jacques Remy (1910–1981).[citation needed] Assayas started his career in the industry by helping him. He ghostwrote episodes for TV shows his father was working on when his health failed. His film Cold Water was screened in the Un Certain Regard section at the 1994 Cannes Film Festival.[1] His biggest hit to date has been Irma Vep, starring Hong Kong star Maggie Cheung, which manages to be a tribute both to French director Louis Feuillade and to Hong Kong cinema. While working at Cahiers du cinéma, Assayas wrote lovingly about European film directors he admires but also about Asian directors. One of his latest films is a documentary about Taiwanese filmmaker Hou Hsiao-Hsien. He married Hong Kong movie actress Maggie Cheung in 1998. They divorced in 2001, but their relationship remained amicable, and in 2004 Cheung made her award-winning movie Clean with him. He married actress-director Mia Hansen-Løve. They met when Hansen-Løve, then seventeen at the time, starred in Assayas' 1998 feature Late August, Early September, but "[they] didn't get together until [she] was 20".[2] In April 2011, it was announced that he would be a member of the jury for the main competition at the 2011 Cannes Film Festival.[3] [본문으로]
  12. Peter Handke (born 6 December 1942, in Griffen, Austria) is an avant-garde Austrian novelist and playwright.Handke and his mother (a Carinthian Slovene whose suicide in 1971 is the subject of Handke's A Sorrow Beyond Dreams, a reflection on her life) lived in the Soviet-occupied Pankow district of Berlin from 1944 to 1948 before resettling in Griffen. According to some of his biographers, his stepfather Bruno's alcoholism and the limited cultural scope in the small town have contributed to Handke's revolt against habitualness and restrictions. In 1954 Handke was sent to the Catholic Marianum boys' boarding school at Tanzenberg Castle in Sankt Veit an der Glan, Carinthia. Here, he published his first texts in the school paper, the Fackel. In 1959, he moved to Klagenfurt, where he went to high school. In 1961, he commenced law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Graz.[1] [본문으로]
  13. Jacques Rozier (born in 1926 in Paris) is a French film director and screenwriter. He is one of the lesser known members of the French New Wave movement and has collaborated with Jean-Luc Godard. Three of his films have been screened at the Cannes Film Festival.[1] In 1978, he was a member of the jury at the 28th Berlin International Film Festival.[2] [본문으로]
  14.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의 대표적인 감독. '프랑스 영화계의 랭보'로 불린다. 1960~80년대에 걸쳐 《아네모네》,《추억의 마리》,《내부의 상처》,《아타노르》,《비밀의 아이》등을 연출하였다.[출처] 필립 가렐 [Philippe Garrel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15. Chantal Anne Akerman (born 6 June 1950) is a Belgian film director, artist, and professor of film at the European Graduate School.[1] Akerman's best-known film, Jeanne Dielman, 23 quai du Commerce, 1080 Bruxelles (1975), exemplifies a dedication to the ellipses of conventional narrative cinema.[ [본문으로]
  16. Serge Daney (June 4, 1944 - June 12, 1992) was an influential French movie critic who went on from writing film reviews to developing a “television criticism” and onto building a personal theory of the image. Although highly regarded in French and European film criticism circles, his work remains little known to English-speaking audiences, largely because it has not been consistently translated. [본문으로]
  17. Canal+ ("Canal Plus", "C+" meaning "Channel Plus/More" in French) (Euronext: AN) is a French premium pay television channel launched in 1984. It is 80% owned by the Canal+ Group, which in turn is owned by Vivendi SA. The channel broadcasts several kinds of programming, mostly encrypted. The un-encrypted programmes can be viewed free of charge on Canal+ and on satellite on Canal+ Clair (Clear). [본문으로]
  18. [ Information Network Architecture ] 미국의 주요 RBOC들이 공동 운영하는 연구 기관인 벨 코어(Bellcore)에서 표준화하는 정보 네트워크 체계. 교환·전송·통신 처리 등 고도의 실시간 처리 시스템의 운영 체계(OS) 인터페이스 등을 표준화하여, 서로 다른 제품을 이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상호 통신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본문으로]
  19. 클로소프스키 [Pierre Klossowski, 1905~] 니체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프랑스의 소설가 겸 평론가. 치밀한 논리에 의하여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냉철하게 분석한 작품은 풍부한 상상력을 구사하여 새로운 인간상을 예언했다. 주요 저서에는 《나의 이웃사람 사드》등이 있다.[출처] 클로소프스키 [Pierre Klossowski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20. Jean-Pierre Rassam (nationality Lebanese) (1942–1985) was a noted French film producer of the 1970s. [본문으로]
  21. Sophie Toscan du Plantier (28 July 1957 - 23 December 1996) was a French film producer beaten to death outside her holiday home near Toormore, Skibbereen, County Cork, Ireland on the night of 22 December 1996. She was the wife of another film producer, Daniel Toscan du Plantier. The murder remains unsolved,[3][4][2] and has been the centre of an extradition case surrounding a prime suspect in the case, Ian Bailey, and the desire of the French authorities that he be brought to France to stand trial[5]. [본문으로]
  22. Monte Hellman (born July 12, 1932, in New York City, New York) is an American film director, producer, and film editor. Hellman is among a group of directing talent mentored by Roger Corman, who produced several of the director's early films. Hellman's most critically acclaimed film to date has been Two-Lane Blacktop (1971), a road movie that was a box office failure at the time of its initial release but has subsequently turned into a perennial cult favorite.[1] Hellman's two acid westerns starring Jack Nicholson, Ride in the Whirlwind and The Shooting, both shot in 1965 and released directly to television in 1968, have also developed cult followings, particularly the latter.[1] A third western, China 9, Liberty 37 (1978), was far less successful critically, although it too has its admirers,[2] as do Cockfighter (1974) (aka Born to Kill)[3] and Iguana (1988).[4] In 1989 he directed the straight-to-video slasher film Silent Night, Deadly Night 3: Better Watch Out!. In 2006, he directed "Stanley's Girlfriend," a section of the omnibus horror film Trapped Ashes. Hellman's section of the film was presented by the Cannes Film Festival that year as an "Official Selection" and Hellman was named president of the Festival's "Un Certain Regard" jury. In 2010 he completed a new feature film, the romantic film noir thriller, Road to Nowhere, which competed for the Golden Lion at the 67th Venice International Film Festival.[5] [본문으로]
  23. Arte (prononcé arté) est une chaîne de télévision généraliste franco-allemande de service public à vocation culturelle européenne. La chaine Arte est un groupement européen d’intérêt économique (GEIE), basé à Strasbourg. Elle est librement accessible principalement via la TNT, le câble, le satellite et l'ADSL TV [본문으로]
  24. Francis Ford Coppola ( /ˈkoʊpələ/ koh-pə-lə; born April 7, 1939)[1] is an American film director, producer and screenwriter. He is widely acclaimed as one of Hollywood's most innovative and influential film directors.[1] He epitomized the group of filmmakers known as the New Hollywood, that includes George Lucas, Martin Scorsese, Robert Altman, Woody Allen, William Friedkin, Peter Bogdanovich, and Brian De Palma who emerged in the early 1970s with unconventional ideas that challenged contemporary filmmaking [본문으로]
  25. [/footnote]35mm복사판과 DCP버전을 가지고 있었어요.문제가 없을 거라 내게 말하면서 블루-레이[footnote]블루레이 디스크(Blu-ray Disc, BD로 약칭)는 고선명(HD) 비디오를 위한 디지털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도록 소니가 주도하는 BDA(블루레이 디스크 협회, Blu-ray Disc Association)에서 정한 광 기록방식 저장매체이다. 영미권에서 'Blue-ray Disc'는 일반 명사로 구분되어 상표로 등록될 수가 없었기 때문에, 'e'자가 제외되어 최종적으로 등록상표가 되었다. 블루레이 디스크는 저장된 데이터를 읽기 위해 DVD 디스크에 비해 훨씬 짧은 파장(405나노미터)을 갖는 레이저를 사용함으로써 DVD와 같은 크기인데도 더 많은 데이터를 담는 것이 가능하다. 현재 단층 기록면을 갖는 12센티미터 직경의 블루레이 디스크로 25기가바이트의 데이터를 기록할 수 있으며, 듀얼 레이어 디스크(BD-50)으로는 그 두 배 용량의 데이터(50기가바이트)를 저장할 수 있다. 블루레이 디스크는 컴퓨터 데이터용 블루레이 디스크(BD-ROM), 기록 가능(Recordable) 블루레이 디스크(BD-R), 재기록 가능(Rewritable) 블루레이 디스크(BD-RE) 등 블루레이 디스크의 여러 변형이 존재하며, 블루레이 디스크에 담긴 비디오 데이터의 무단 복제를 막기 위해 강력한 여러 복제 방지 기술이 구현되어 있다. 이 기술은 각 디스크 별로 다르게 적용할 수 있어, 한 디스크의 복제 방지 기술이 무력화되더라도 다른 디스크의 복제 방지 기술에는 접근할 수 없는 등의 특징을 갖는다. 또한 워터 마킹 기술이 사용되어 BD-ROM의 제작 업체 등을 쉽게 확인할 수 있어, 인증되지 않은 업체의 디스크 무단 제작을 막는 것이 가능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