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한트케 Peter Handke

■페터 한트케의 저서라면 새로울 게 없다. 세권의 페터 한트케 저서라면 그의 교수진들과 함께한 논의와 더불어 상호적으로 더욱 빛을 발하는 대신, 그 효과가 감소되었다. 그 결과로 각자 모호한 채 남아있다. 두 권의 소설에서, 상투적으로 다른 작가들이 La Nuit Morave 라고 부르고 싶어한다. 그리고 두번째는 칼리, 그저께 이야기 Kali, histoir d'avant-hier 이다. 또, 일기문인 길을 가는 과거 Hier en chemin 은 보다《수첩》인 것처럼, 날짜가 기록되어 있어서 《허구》의 것과 진실을 바로 가까이 연결짓는다. 독자들은 그의 세권의 소설을 이어가는 동일한 여정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이 각자 독립적인 형식으로 존재하지만. 
 이런 점은 페터 한트케가 예전부터 겨냥해왔던 바이다. 현대 어느 위대한 작가라하더라도 그만큼 희망이 없는 존재의 감각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유로워지길 바라거나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다른 이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이야기나 모험이야기만 씁니다. 다른 것은 없어요! 》라고 한트케는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Je sortis de ma maison tranquille (2000) 의 마지막 장에 기술했다. 그래서 칼리 Kali에서처럼 그런 계획이 가능했던 것이다. 방랑객의 이야기, 란슬롯의 고전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의 짐수레를 탄 기사 Chevalier à la charrette 에서는 트로이의 목마를 연상시키며, 환상적인 도시는 지옥의 어느 곳,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끔찍한 나라로 비춰진다. 그는 Nuit Morave 에서 독자들을 동일하게 《비탄에 잠긴 유럽, 비참한 국가》 중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는 이 곳을 사마르칸트의 미스테리로써,  《로마제국의 대항한 최후의 보루이자 피난지》였던 누만시아 지역에 비유한다. 한 남자가 모래에 좌초되어 강가에 닻을 내린 보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랑의 모험과 여정에 대해서.
 페터 한트케는 그의 소설을 보다 거슬러올라가 기원을 찾고자 한다. 자칭《사실주의》라는 명목으로 우리는 혐오의 시기를 구분한다. 그는 불확실하게도 그 기원을 찾아 올라가며, 기사 소설과 악당 소설의 형식을 취한다. 트로이의 목마나 세르반테스의 의미를 차용한다. 
 작가 스스로《고전으로의 길》이라 말하며, 한트케는 우리를 그의 영웅으로 이끈다. 조금은 바뀌었지만 :  《 길 위의 사람들에 관한 고전적 이야기는 결국 사람들이 찾아서 읽는다. 모험 속 주인공이나, 라만차[각주:1], <라만차의 사나이(Man of La Mancha)>, <내게 뭘 원하나 (What does he want of me?)> 등이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1964년에 미국 코네티컷주의 굿스피드오페라하우스(Goodspeed Opera House)에서 초연되었고, 1965년 토니상에서 베스트뮤지컬 등 5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한국에서는 라이센스 작품이 2005년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지속적으로 공연되고 있다. 이 작품은 더 뮤지컬 어워즈(2009)에서 작품상 등 5개부문을 수상하였다.[출처] 맨 오브 라만차 [Man of La Mancha ] | 네이버 백과사전 " valign="top"> 처럼 기사이야기는 반복된다. 나는 어떤 인물이 계속 회자될 지는 모른다. 비록 고전을 좇기는 하지만, 아침이 다되어 해가 뜨는 것처럼 그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말할 만큼이 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어떤 특별한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고전》의 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사소설에서 차용한 인물은 다르다. 역설적으로 그는 《아무개》,  《어떤 존재감 없는 인물》을 이야기하듯, 《아버지가 없는 자》, 《어느 지방의 왕자》, 《유령》 을 말한다. 엣 창작자들의 익명성을 말하는 《노 맨즈 랜드》처럼, 익명의 대륙에서 순수하고 놀라운 수수께끼사건들이 일어나며 이야기가 이어진다. Hier en chemin 의 놀랍도록 멋진 매 페이지마다 그리스나 스코틀랜드, 그리고 일본, 포르투칼의 여정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마치 자연은 예언자처럼, 나뭇잎들이 소소히 그 소리를 내고, 폭풍이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마치 한트케의 분신인 것처럼.
 결국,필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그는 그의 정치적 위치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어 그 자격이 추락했던 작가들 중의 한명이다. 아니, 틀렸다. 나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하지만 나의 경우를 떠나서, 언젠가는 문학적 부조화에서 온 허구가 당당히 승리할 것이다. 한트케의 소설이 다른 이들의 존엄을 지켜낼 이라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 


출처  : 72 page, ARTPRESS #380
기사  : Philippe Forest
번역  : PLONGEUR ( zamsoob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