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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2.01 Art and Humour (8)_ 도미니크 노구에 Dominique Noguéz _인터뷰

Art and Humour (8)_ 도미니크 노구에 Dominique Noguéz _인터뷰

《나는 내가 알고있는 가장 유머감각이 없는 사람이다.》


철학사상, 실험영화 에 열정적이며 수많은 저서, 매음굴과 다른 기습적 상황의 몽테뉴 Montaigne au bordel & autres surprises (2011) 를 쓴 그는 자기자신과 타인을 향한 웃음을 잘 알고 있다.

1969년부터 미학 리뷰 Revue d'esthétique 에 실린《 유머 언어의 구조 》란 논평을 보면, 유머는 당신 창작물, 텍스트나 조형물 모두에 해당하는 핵심인 듯합니다. 유머의 어떤 힘을 가치있다고 생각하시나요?
 1965-1966년에 그런 주제를 다룬 적이 있죠. 지금은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 Vladmir Jankélévitch [각주:1] 처럼 추억으로 불리죠. 얀켈레비치는 그의 훌륭한 저서 아이러니l'Ironie 에서 유머를 지지하고 있어요. 비단 철학이나 문학 뿐 아니라, 음악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죠. 난 몇년 간 그의 밑에서 수학했어요. 그 기간이 꽤 길었는데, 내가 교수자격을 취득한 이후로, 잔혹한-잔혹한 동시에 온화하고, 매혹적이며, 불가피한 것들이었죠- 주제에 대해 내 이론을 실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죠...대학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했지만 끝까지 저항했죠. 최소한 반 세기 동안은 내 이론을 끝까지 견지( 내 말은 : 이 것이 생생한 동시에 제한적이라는 주제 ) 했다는 거죠! 그래서 난 주제를 바꿔서 더 이상 유머에 집착하지 않았어요. 그걸로 심사숙고하거나 비밀을 파헤치려하지 않았죠. 시도적인 면에서 그건 소매 한 쌍의 한 짝 같은 거지요 : 난 아마도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유머감각이 없는 사람일 겁니다. 그건 유사한 것들을 보다 폭넓게 쓸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는 게 아니죠- 다리 하나의 장애우가 높이뛰기에서 기록을 올리려는 에너지로요...

유머를 정의하는 게 가능한가요, 이런 정의가 변화하는 건가요?
 내가 알고 있는 유머전문가들과 그중 특출한 자는 영국인인 Louis Cazamian 인데, 1906년 저술한 소위《왜 우리는 유머를 정의내릴 수 없는가 》란 논문에서 그에 대한 9개의 정의도 덧붙이고 있죠. 긍정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난 Saussure 에 갔어요(당시는 기호학의 시대였죠) 얀켈레비치의 회의적 태도가 생각나는군요. 난 지금 더 신중해졌어요. 정의를 내리는 구실들은 계속 변합니다. 내가 붙잡기 힘든 두세가지 임시적 요소들도 있어요. 첫번째는 유머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단어라는 건 실제적으로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가리키고 있죠. 완전히냐 아니냐이지만. 열락의 즐거움, 말장난의 풍자, 거친 농담 등등. 나는 그와는 반대로 단어가 《 신비로운 교환 》을 위한 것이라는 입장이예요. 앙드레 브레통 André Breton 은 블랙유머에의 향수 Anthologie de l'humour noir 에서 《 지적 사치의 유일한 법칙 》이라고 설명했죠.
그리고 두 번째는 유머를 분류하는 데 지리나 종족이란 기준이 무의미하단 겁니다. 스페인에서 러시아까지《 영국식 유머》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들이 영국인 특유의 침착함을 가지고 무언가 만든다면 말이죠. 마찬가지로 영국식 원이나 타뮬(남인도의 드라비다족)식 직사각형은 존재하지 않아요. 원이나 직사각형이나 모두 세계공통인거죠. 다시 말해 유머도 세계적 구조를 지닌 것입니다.

유머의 무지개 l'Arc-en-ciel des humours 에서 유머의 형태, 역사, 소재등을 세계적으로 보기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유머의 색깔이 가진 위상을 개발시켜나갔습니다. 어떤 색깔들인가요?
 Tel Huysmans 는《블랙 유머 》란 표현을 고안했죠. 유머가 나타날 수 있는 상황들을 색깔들로 구분하려는 겁니다 : 노란 색-《쓴 웃음(노란 웃음 rire jaune 은 불어로 쓴 웃음을 가리킨다) 》- 은 사람들이 비굴해질 때 쓰이는 말이죠. 소크라테스 Socrate 가 모든 것을 아는 체 하는 어린 앵무새 앞에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것처럼 ; 녹색- 보들레르의《녹색 천국 》처럼- 이 말은 순박한 경우에 쓰이죠, 몽테스키외의 페르시아인, 휴론족 등에서죠 ; 적색,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상황이죠 ( 캉디드 Candide 에서처럼, 볼테르 Voltaire 는 아바레스족과 야만족 간의 전쟁의 잔혹성을 묘사한바 있다); 청색- 메테를링크maeterlinck[각주:2] 는 파랑새 l'Oiseau bleu 를 예찬한 바 있죠- 이상한 세계를 진지하게 묘사할 때(앙리 미쇼 Henri Michaux [각주:3] 의 에망글롱 émanglons 을 상기해볼 것 ); 백색은 언어가 자멸하면서 부조리함에 흔들리는 것( 닳고 닳긴 했지만 리히텐베르그 Lichtenberg[각주:4]《 날 없는 검 자루 없는 칼》 ) 이죠. 모방작품이던지 패러디던지 어느 경우이든, 유머는 카멜레온처럼 한번에 모든 색을 가질 수 있죠.
 물론 이런 차원의 분석은 충분치 않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유머를 세계적으로 정의내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상을 위해 계속 점진적인 발전을 할 겁니다. 직관적 요소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어도 항상 존재하죠.

어떤 것들인가요?
우선, 연극과 수사학에서 유머가 그렇습니다. 유머는 놀이(각자 역활을 맡는다는 점에서 )입니다. 가면을 통해 이뤄지죠. 비록 그 가면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도. 유머 속에 있는 것은, 1차적 생의 내부- 무언가 죽음과 연결되있는 지점에까지 지치게 하는 요소들-에서 2차적 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이렇습니다 :  ( 보리스 비앙 Boris Vian [각주:5]의 지인인《주류 Major 》 )소크라테스, 바세 Jacques Vaché[각주:6], 크라반Arthur Cravan[각주:7] , 리고 Rigaut[각주:8] , 루스탈로 Loustalot, 앙드레 프레데릭 André Frédérique[각주:9] , 샤발 Chaval -모두 자살했죠. 우리가 스위프트 Swift [각주:10], 리히텐베르그 Lichtenberg , 사티 Satie [각주:11]의 이름을 덧붙여서 유머를 실현한 사람들의 약소한 목록을 만들 수 있겠죠. 가장 신랄한 수사법은 유머를 위해 보조로 쓰일 뿐...침묵을 지키거나 완전히 하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가 말했듯, 수위의 과학이란 겁니다. 신(혹은 악마)는 세부사항에 달려있죠. 다시 말해 ; 유머 역시 수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형식을 갖추기 시작한 이래로, 누군가 임시 정의를 내릴 수도 있을 겁니다 :《 유머는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수단이다 》아니면《 사드 Sade 의 잔인성과 공존하는 부다의 자애로운 미소. 》하지만 두 문구 모두 완벽하지 않아요. 내가 내린 정의가 아니니까요 :《 유머 : 절망의 인사 》(크리스 마커 Chris Marker  , 1950 ); 《 난 그게 감각적이라고 생각한다- 거의 SENS라고 말할 뻔 했다-또 연극의 무의미성(기쁨이 없는) 》(자크 바세 , 1917)


출처 : Beaux Arts Magazine N.326 , 2011.8
기사 : Stéphanie Moisdon
번역 : PLONGEUSE ( zamsoobu )
  1. Vladimir Jankélévitch (31 August 1903 in Bourges – 6 June 1985 in Paris) was a French philosopher and musicologistJankélévitch was the son of Russian Jewish parents, who had emigrated to France. In 1922 he started studying philosophy at the École normale supérieure in Paris, under Professor Bergson. From 1927 to 1932 he taught at the Institut Français in Prague, where he wrote his doctorate on Schelling. He returned to France in 1933, where he taught at the Lycée du Parc in Lyon and at many universities, including Toulouse and Lille. In 1941 he joined the French Resistance. After the war, in 1951, he was appointed to the chair of Moral Philosophy at the Sorbonne, where he taught until 1978. The extreme subtlety of his thought is apparent throughout his works where the very slightest gradations are assigned great importance. Jankelevitch, who drew on Platonist, Neoplatonist and Greek Patristic sources in establishing his essentially agnostic thought, was resolute in his opposition to German philosophical influence [본문으로]
  2. 마테를링크 Comte Maurice ~ (1862-1949) ((벨기에의 극작가·시인)) Maurice Polydore Marie Bernard Maeterlinck,[1] also called Comte (Count) Maeterlinck from 1932,[2] (French pronunciation: [mo.ʁis ma.tɛʁ.lɛ̃ːk] in Belgium, mɛ.teʁ.lɛ̃ːk in France;[3] 29 August 1862 – 6 May 1949) was a Belgian playwright, poet, and essayist who wrote in French. He was awarded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in 1911. The main themes in his work are death and the meaning of life. His plays form an important part of the Symbolist movement. [본문으로]
  3. [Henri Michaux, 1899.5.24~1984.10.18]20세기 중반 프랑스의 시인·화가.신비주의와 광기의 교차점에 서는 독자적 시경을 개척, 현대 프랑스 시의 대표적 시인의 하나로 지목된다. 저서는《에콰도르》,《아시아의 한 야만인》,《내면의 공간》,《비참한 기적》등이다벨기에 출생. 브뤼셀에서 성장하였다. 일찍부터 신비주의 작가들의 저작을 탐독하고, 1920년 선원이 되어 유럽과 아메리카를 순항, 귀로에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시인 C.D.로트레아몽과 J.쉬페르비엘에게 깊은 감명을 받고 1922년 본격적으로 시작에 들어갔다. 1955년 프랑스에 귀화, 처음에 《에콰도르 Ecuador》(1929) 《아시아의 한 야만인 Un barbare en Asie》(1932) 등 실재(實在)의 땅을 상상적으로 서술한 작품을 발표, A.지드의 주목을 끌었다. 1945년부터는 신비주의와 광기(狂氣)와의 교차점에 서는 독자적인 시경(詩境)을 개척, 현대 프랑스 시의 대표적 시인의 한 사람으로 지목된다. 주요 저서에 《내면의 공간 L’Espace du dedans》(1944) 《시련, 악귀 쫓기 Épreuves, éxorcismes》(1945) 《주름 속의 삶 La Vie dans les plis》(1950) 《비참한 기적 Misérable miracle》(1955)《부산한 무한(無限) L’infini turbulent》(1957) 등이 있다. [출처] 앙리 미쇼 [Henri Michaux ] | 네이버 백과사전[출처] 앙리 미쇼 [Henri Michaux ] | 네이버 백과사전 [출처] 앙리 미쇼 [Henri Michaux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4. 게오르크 리히텐베르크 [Georg Christoph Lichtenberg, 1742.7.1~1799.2.24] [출처] 게오르크 리히텐베르크 [Georg Christoph Lichtenberg ] | 네이버 백과사전다름슈타트 출생. 괴팅겐대학에서 자연과학을 전공, 1775년 이 대학 자연과학 교수가 되었다. 계몽사조기의 대표적 사상가로서 레싱(1729∼1781)과 병칭되었다. 전통과 인습에 구속되지 않는 오성(悟性)과, 인간의 심리(心理)를 꿰뚫어보는 눈과, 풍자 ·유머 등의 재능을 겸비하였다. 1777년 ‘리히텐베르크도형(圖形)’을 발견하였고, 1778년부터 《괴팅겐포켓연감:Göttinger Taschenkalender》을 발행, 여기에 많은 자연과학 및 철학 논문을 수록 ·발표하였고, 《영국소식》(1775∼1778)에서 셰익스피어극배우(劇俳優)의 연기를 뛰어나게 분석함으로써, 독일배우 비평의 기초를 닦았다. 《호가드의 동판화 설명:Ausführliche Erklärung der Hogarthischen Kupferstiche》(1794∼1799)은 영국의 풍자화가 호가드(1697∼1764)의 동판화를 해설함으로써 독일 시민사회의 병폐에 일침을 가한 탁월한 문명비평과 사회비평서이다. 대학시절부터 써왔던 《잠언집(箴言集)》은 후에 니체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심리적 인간관찰의 집대성으로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된다[출처] 게오르크 리히텐베르크 [Georg Christoph Lichtenberg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5. (10 March 1920 – 23 June 1959) was a French polymath: writer, poet, musician, singer, translator, critic, actor, inventor and engineer. He is best remembered today for his novels. Those published under the pseudonym Vernon Sullivan were bizarre parodies of criminal fiction, highly controversial at the time of their release. Vian's other fiction, published under his real name, featured a highly individual writing style with numerous madeup words, subtle wordplay and surrealistic plots. L'Écume des jours (Froth on the Daydream) is the best known of these works, and one of the few translated into English. Vian was also an important influence on the French jazz scene. He served as liaison for Hoagy Carmichael, Duke Ellington and Miles Davis in Paris, wrote for several French jazz-reviews (Le Jazz Hot, Paris Jazz) and published numerous articles dealing with jazz both in the United States and in France. His own music and songs enjoyed popularity during his lifetime, particularly the anti-war song "Le Déserteur" (The Deserter). [본문으로]
  6. Jacques Vaché (7 September 1895 - 6 January 1919) was a friend of André Breton, the founder of surrealism. Vaché was one of the chief inspirations behind the Surrealist movement. As Breton said: "En littérature, je me suis successivement épris de Rimbaud, de Jarry, d'Apollinaire, de Nouveau, de Lautréamont, mais c'est à Jacques Vaché que je dois le plus" ("In literature, I was successively taken with Rimbaud, with Jarry, with Apollinaire, with Nouveau, with Lautréamont, but it is Jacques Vaché to whom I owe the most") He was born on 7 September 1895 in Lorient, France, and died in Nantes on 6 January 1919 from an overdose of opium. He was known for his indifference and for wearing a monocle. [본문으로]
  7. Arthur Cravan (born Fabian Avenarius Lloyd[1] on May 22, 1887, Lausanne, Switzerland) was known as a pugilist, a poet, a larger-than-life character, and an idol of the Dada and Surrealism movements. He was the second son of Otho Holland Lloyd and Hélène Clara St. Clair. His brother, Otho, was born in 1885. His father's sister, Constance Mary Lloyd, was married to Irish poet Oscar Wilde.[2] He changed his name to Cravan in 1912 in honour of his fiancée Renée Bouchet, who was born in the small village of Cravans in the department of Charente-Maritime in western France. Why he chose the name Arthur remains unclear. Cravan was last seen at Salina Cruz, Mexico in 1918[3] and most likely drowned in the Pacific Ocean off the coast of Mexico in November 1918.[citation needed] [본문으로]
  8. Jacques Rigaut (30 December 1898 – 9 November 1929) was a French surrealist poet. Born in Paris, he was part of the Dadaist movement. His works frequently talked about suicide and he came to regard its successful completion as his occupation. In 1929 at the age of 30, as he had announced, Rigaut shot himself, using a ruler to be sure the bullet would pass through his heart.[1] He is buried in the Cimetière de Montmartre. [본문으로]
  9. André Frédérique (27 February 1915, Nanterre - 17 May 1957) was a French poet. He was a son of a police officer. He became a member of the Parisienne bohème (befriending people like Jean Carmet). His works, often full of black humour (which did not save him from suicide caused by his feeling of a metaphysical hopelessness) are similar to Henri Michaux [본문으로]
  10. [Jonathan Swift, 1667~1745.10.19] 아일랜드 더블린 출생. 유복하였으나 아버지가 그의 탄생 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백부의 손에 양육되었다. 더블린의 트리니티칼리지를 졸업한 뒤 은퇴한 외교관으로 정치인이었던 W.템플의 비서가 되어, 그 집에 기식하였다. 그 때까지의 생활이 후년의 풍자작가 스위프트의 성격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1694년 한때 템플가(家)를 나와 아일랜드에서 영국교회의 목사가 되었으나, 곧 템플가로 되돌아갔다가 템플이 죽자 다시 아일랜드로 가서 성직에 복귀하였다. 그 후부터 정치에 야심을 갖고, 이따금 런던을 왕래하였고, 당시 2대 정치세력이던 휘그당과 토리당 양쪽에 접근, 팸플릿을 써서 논전(論戰)을 폈다.1713년 더블린의 세인트패트릭성당의 사제장으로 임명되었으나, 그것은 그에게 승진이라기보다 오히려 정적 또는 정우들의 경원책(敬遠策)의 일환인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누구에게나 위험한 논객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정계와 문단의 배후 실력자적 존재였으나, 14년 앤 여왕이 죽자 당시 그의 정적이던 휘그당 세력이 압도적으로 많아져, 그는 아일랜드로 낙향하였다. 1730년대 말엽부터 정신착란 증세가 나타나, 1742년에는 발광상태에 빠졌다. 스위프트의 이름과 함께 반드시 연상되는 2명의 여성, 스텔라라고 불리는 에스터 존슨과 바네사라고 불리는 에스터 바넘리의 어느 쪽에 대해서도 정상적인 애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관계는 전기상 흥미깊은 문제이다. 주요저서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1726)를 비롯하여, 정치 ·종교계를 풍자한 《통 이야기 A Tale of Tub》(1704) 《책의 전쟁 The Battle of the Books》(1704), 스텔라 앞으로 된 일기적 서간집 《스텔라에게의 일기 The Journal to Stella》(1710∼1713) 등이 있다. [출처] 조너선 스위프트 [Jonathan Swift ] | 네이버 백과사전[출처] 조너선 스위프트 [Jonathan Swift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11. [Erik Alfred Leslie Satie, 1866.5.17~1925.7.1][노르망디의 옹프루르 출생. 옹프루르의 교회 오르가니스트인 비노에게 피아노와 그레고리오성가를 배우고, 12세 때 파리로 나와 콩세르바트와르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아카데미즘에 반감을 느껴 이듬해 퇴학하고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하였다. 1887년 처음으로 피아노곡집을 출판하여 그 특이한 악풍으로 파리악단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생계를 위하여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피아노를 치는 동안 드뷔시를 사귀게 되었다. 1905년 39세의 나이로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하여 대위법을 배우고 1909년 졸업하였는데, 이 무렵에 콕토, 피카소, 댜길레프 등과도 사귀었다. 1916년 콕토의 시나리오에 곡을 붙인 발레곡 《파라드 parade》를 발표하고, 또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큐비즘 ·다다이즘 등의 예술운동에도 참가하였다. 미요 등 ‘프랑스 6인조’는 사티를 높이 평가하여 그들의 정신적인 아버지로 삼았으며, 1923년에는 6인조의 다음 세대인 데조르미에르가 사티를 중심으로 한 그룹을 만들어 ‘아르쾨유악파’가 출범하였다. 이와 같은 칭찬 속에서도 사티 자신은 불안과 회의, 정신적인 고독에 싸인 채 죽었다. 작풍의 특징은 본질적으로 어린이와 같은 순수성에 있으며 작품에는 교향적 극작품 《소크라테스》, 발레음악 《파라드》, 피아노곡 《배[梨] 모양의 3개의 곡 Trois Morceaux en forme de poire》(1903) 《개를 위한 엉성한 진짜 전주곡 Vértable prélude flasques(pour un chien)》 《바싹 마른 태아 Embryons dessénchés》 《관료적인 소나티네 Sonatine bureaucratique》 등이 있다.[출처] 에릭 사티 [Erik Alfred Leslie Satie ] | 네이버 백과사전출처] 에릭 사티 [Erik Alfred Leslie Satie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